늦잠을 자는 바람... 에라이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존 파울즈의 일기 정리.
(1950년)
80쪽 / 안전한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경멸하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안이다.
ㅡ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과의 괴리는 얼마나 큰가. 그러거나 말거나 요새 세상에 진정한 '안전한 길'이란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안전하게 보이는 길에도 얼마나 많은 지뢰들이 묻혀 있는 사회인가.
107쪽 / 어떤 책이든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세 번 정도 읽지 않는 한, 그 책에 대해 섣불리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ㅡ 음... 두 번도 적다 이거지. 그래, 세 번.
134쪽 / 자신의 인생을 문학 창작의 도구로 삼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믿어야 한다.
ㅡ 서글프지만, 꼭 서글프다고만 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1951년)
144쪽 / 앞으로는 더 멋지고 더 세련되게 인생을 표현하는 일에 힘쓰도록 하자. 인생을 발견하려고 하지 말고.
ㅡ 일기든, 소설이든. 어차피 인생이 깊은 바닷속에 묻혀 있는 진주는 아니니까.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161쪽 / 나는 글을 너무 많이 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학대다.
ㅡ 얼마나 많이 쓰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166쪽 / 우리는 함께 있으면 나른함과 부드러움이 전신을 감싸 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강력한 공감 같은 것.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얼이 빠졌다 abruti>고 말한다.
ㅡ 이런 감정을 못 느껴본 지가 벌써...
187쪽 / T.S. 엘리엇. 그의 견해를 반박한다는 것은 짜증이 날 정도로 불가능하다. 그는 모든 창작의 시금석이다. 스타일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플로베르와 말라르메의 논리적 결론이다.
207쪽 / 나는 한 여자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가 없고, 지금 G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러 여자를 사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른 여자들을 그녀보다 더 사랑할 수는 있을 것이나 결코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나 자신, 나의 미래, 나의 창조되지 않은 자아를 너무나 사랑해 나 자신을 완벽하게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257쪽 /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가 모두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영역 성서는 뛰어난 천재의 작품이다. 호메로스가 그리스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영역 성서는 영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ㅡ 2006년부터 매년 독서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나 4년 연속으로 실패하는 성경 읽기. 올해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 그나저나 한국인들을 위한 텍스트는 무엇이 있을까?
259쪽 / 자신의 상상력을 잘 조직하는 것은 창작으로 가는 핵심적 발걸음이다. 먼저 상상력의 결과물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것, 새로운 쾌감, 새로운 조망은 그것이 새롭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52년)
331쪽 / 리얼리즘이라는 까다로운 테크닉을 모파상처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작가는 없다.
347쪽 / 성교는 인생이 한 가지 목적일 뿐, 사랑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에서는 그런 견해가 거의 정상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377쪽 / 프랑스 사람, 프랑스, 이 나라의 생활 방식, 그 언어에 대한 사랑. 프랑스인은 건전한 자기중심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생활은 균형이 잡혀 있다. 그들은 영성(靈性)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동물성을 인정한다. 그들은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판단하지만 그들에게 아첨을 하거나 비난을 하지는 않는다.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황금의 중용(中庸),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계승한 현대인.
381쪽 / 훔치기는 스페인의 국민적 스포츠가 된 듯하다. 이것은 파시즘의 또다른 부산물이다. 위에서 힘으로 통치하니까 밑에서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ㅡ 비단 20세기 중엽 다른 나라의 일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432쪽 / 말은 통제할 수 있었지만 눈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선을 피하며서 말하는 것이었다.
ㅡ 으아 세상에나!
450쪽 / 나는 이제 독서량을 줄여야 할 때인 것 같다. 문학계의 중요 인사들을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
ㅡ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 파울즈가 너무 부럽다. 난 아직 문학계 중요 인사들 중 반의 반도 보지 못했으니까.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늦게 태어난 것도 죄가 될 순 없지 하하.
(역시 일부만 옮겨둔다.) 존 파울즈의 작품이라면 예에전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다가 별로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 절반쯤에서 덮었고, <컬렉터> 절판본을 구해 보긴 했으나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수업 때문에 3년 전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다시 봐야 했다. 심지어 발표까지 해야 했는데, 그때도 역시 별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읽고 있는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2>를 다 보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역시 소설은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은 보고 말해야... 특히 나처럼 비평적 관점이 부실한 독자라면.
아래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대한 잡담. 리뷰를 쓴 것도 같은데 찾을 수가 없...;; 역시나 2007년 가을에 썼다. 괄호 안 별표 속 얘기는 당시에 쓴 것이고, 샵 뒤의 얘기는 지금 쓴 것.
펼쳐두기..
추석 때부터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느긋하게 읽고 있는데 가능한 빨리 다 읽어야겠다. 다름이 아니라 이 소설에 대해 조별 발표를 해야하는데, 나는 비평 부분을 맡았고, 아무튼 오늘 수업 시간에 조장이 말하길 - 다음 주까지 대강 정리해서 보자꾸나. 다행히 내일은 휴일이고, 목요일 금요일이 학교 축제라 완독하고 자료 정리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겠다. 이 정도만 쓰고 넘어가려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2년 전쯤에 쓴 이 소설의 감상문을 발췌.
결국, 어쩌면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절반쯤 읽은 후 덮어버렸다. 영미문학은 이상하게도 그렇다. (*얼마 본 것도 없으면서 이런 소리를 잘도 해놨다;;) (# 모르면 용감할 수 있다!) 초반엔 굉장히 재미있게 보다가 시나브로 그 가독성이 떨어지고는, 전체 내용의 반 정도 왔을 때 책 읽기를 그만둔다. 왜 그런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 며느리를 둬봤자 그녀도 모를 테지.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그 이유는 내가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두 번째 보며 절실하게 와 닿았던 성귀수의 이 말. "명성 있는 작품에 실망했다면 본인 무지의 소치"(대략 이런 식의 말이었다.))
이 책과 처음 만난 건 2003년 늦가을 무렵이었는데, 한 친구가 자기 수업시간에 이 소설로 공부한다면서 말해 주어 알게 되었다. 그땐,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나중에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잇>에서 이 소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 김영하에 혹해 그의 '모든' 글을 읽어보던 시기. 작가로서의 김영하에게 지금은 그닥 관심 없음.)
보다 말았기에 내용을 다 알지도 못할뿐더러 아는 내용만 구구절절 서술하는 것도 우습기에 - 마치 비둘기의 구구구구 울음소리처럼(* 아, 유치한 말장난 하고는;;) - 내용 얘기는 생략하고, 중요하다 싶은 것 몇 가지만 짚어봐야겠다.
이 소설은 메타픽션으로, ‘전후에 등단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그리고 셰익스피에어세 D.H. 로렌스로 이어지는 영국 문학의 위대한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재창조해 나갈 수 있는 작가’라는 극찬을 받은 존 파울즈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영국 소설의 전통에 형식적 혁신을 접목시’킨 것이다.
그는 각 장(章)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 서적에서 인용한 문구를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그 장의 내용과 관련 있는 글의 구절들로, 모두 이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중엽에 나온 책들에서 차용한 글귀였다. 많은 책을 섭렵한 후 그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쓴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소설에의 치열함을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그러나 그의 문장은 그닥 무겁지 않다. ‘만큼, 같은, 처럼, 듯한’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꽤나 신선한, 그러면서도 객관성을 겸비한 수식을 한다. 마치 레이먼드 챈들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참신함과도 같은 그런 비유. (*지금은 조금 입장이 다른데, 그리 참신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현학적인 말장난을 좋아하는 작가구나, 라는 생각이 조금 들 뿐.)
이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다 읽은 듯한 만족감을 느낀 이유는 13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지금과 차이가 있는데, 41장까지 읽은 현재, 13장에 대한 인상이 그리 강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13장을 보며, 아, 예전에 이 부분이 좋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냥 그 정도였다.)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라고 시작하는 이 장에,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에의 의식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설, 창조, 그리고 소설가라는 단어에 대한 작가 본인의 자의식을 화자의 입을 빌려 고스라니 서술하고 있다. 어차피 13장에서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라 여겨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완독도 하지 않은 소설을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도 이 정도에서 마치는 것이 좋을 듯싶다. (* 정말, 그래야 한다.;;) 어쨌든, 내가 읽든 말든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얻어 마음껏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 다시 읽고 나면 어떤 생각(느낌)이 들지 궁금하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