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NEW)5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6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7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8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9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0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1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2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3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14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5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6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NEW)
17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18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9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0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1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2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4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8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9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24일) <황금 구슬>은 미셸 투르니에의 작가적 역량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비교해서 보면 특히 그렇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적합한 스타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소설을 쓴다. 그런 점에서 투르니에 작품의 번역을 한 명이 전담해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 역자들마다 즐겨 사용하는 어휘, 표현, 더 나아가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번역자가 다르다는 사실이 이렇게 민감하게 다가온 건 굉장히 오랜만, 아니면 처음인 것 같다. (쿳시를 읽으면서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보다 훨씬 잘 읽힌다는 점만 빼면, 두 소설은 공히 내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소설이었다. (어떻게 하면 소설에 대한
취향을 좀 더 확장시킬 수 있을까?) 이미지를 축으로 하여 다양한 에피소드와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버무려놓았지만, 그 속에 심어둔
(현대)철학적 사고관이 너무 빤히 드러나보였다. 그는 (쿤데라 식의) 인간 탐구보다는 철학(의 소설화)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자기 스스로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소설 <마왕>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저 성상이 보여주는 포리의 개념에 외투를 두른 것이라고 볼 수
있소. 내 소설은 모두 그와 같소. 철학적인 개념을 감싸는 이미지의 외투요. 각각의 사물 속에는 한 마리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 알몸으로 나가기를 저어하는 물고기여, 내 그대에게 이미지의 외투를 던져주마ㅡ란자 델 바스토."(390쪽) 이런 점에서 철학이론으로 소설
비평을 하는 문학평론가들이 특히 좋아할 법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는 인상이 짙었다. 무엇보다 맘에 들지 않았던 점은, 어찌된 노릇인지
주인공들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과거 넋두리 내지는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는 것. 심지어는 얘기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사람들처럼 보였다. 실제로 우리들이 그런가?
요
따구로 말하기는 했어도 이 소설에 나오는 민담 혹은 구전적인 이야기는 너무너무 매력적이었다. 특히 붉은 수염 하이레딘의 이야기나,
움 칼숨의 노래 이야기, 금발머리 여왕의 전설 같은 이야기. 책 뒤편에 실려 있는 미셸 투르니에와 이세욱과의 대담을 보니 이런
이야기들은 (다른 데서 차용해서 쓴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서 썼다고. 이야기 만드는 내공은 숨길 수 없는 듯. 그래서 그의
소설보다는 우화집이 더 땡긴다.
PS. 투르니에 소설 읽을 때 옆에 노트를 마련해 단어를
챙겨둔다는 걸 또 깜빡했다. (젠장.) 이세욱이 사용하는 어휘는 단순히 번역할 때 사전 많이 뒤져본다고 나올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것은 예전에 세군이 말했듯, 오랜 시간에 걸쳐 자기만의 단어장을 만들어둔 번역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어휘들이었다.
알랭 푸르니에, <대장 몬느>
(29일) 이 소설은 두꺼운 분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쯤 읽다 그만 덮어버리고 말았다. 난
아무래도 "아련한 감동"이라든지 "아름답게 수놓은
명작"이라든지 "감수성"과 같은 수식이 들어간 소설은 안 맞나보다. (이런 저렴한 취향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낭만적, 수채화, 감성적과 같은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데미안>, <위대한 개츠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였고. 영화의 도움을 얻은 후 다시 보려 했으나 파일을
찾을 수 없네. 굳이 프랑스 p2p를 뒤져가며 볼 것까진 없을 것 같고. 존 파울즈의 <마법사>를 보고 <대장 몬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그런 이유로 우선 존 파울즈가 이 소설을 읽고 쓴 일기 대목을 발췌해둔다. 열린책들에선 소설 제목을 "대장 몬"이라고 표기했다. "<대장 몬>을 처음 읽었다. 크루소처럼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보고, 결국 이 섬에 내가 제일 처음 상륙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상한 체험이었다. <대장 몬>의 모든 행간마다 어른거리는 녹색의 유령은 내가 <마법사>에서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푸르니에의 작품은 수채화풍이고, 내 것은 영화적인 기법이다(물론 나는 책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느 건 아니지만 영화, 특히 환상적이고 낭만적이고 시적인 영화 ㅡ 가령 콕토, 부뉴엘의 <크루소>, 안토니오니, 그 밖의 작품 ㅡ 가 창작에 깊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노리는 바는 똑같다. 미스터리, 순수한 미스터리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장 몬>의 비결은 견실한 농촌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점이다. / 그 힘의 비밀은 이런 것이다. 상징적 심리적 진실이 너무 커서, 표면상의 황당한 얘기들이 다 그런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소설은 현실보다 훨씬 더 환상적일 수 있고, 그래도 독자들이 믿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용기를 준다. (존 파울즈,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2>, 1021-1022p)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30일) 정치소설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정치적인 소설은 언제든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실은, 소설이라면 윤리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이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그 윤리적인 측면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왕은철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을 때, 가능하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라는"
것이다. 나는 가독성이 좋다든지 단숨에 읽어버렸다는 식의 리뷰가 있는 소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피곤하게) 굳이
활자를 통해 접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매체를 통해서 봐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경우 많지 않은 분량(총267쪽)임에도 단번에 읽는 일이 힘든 소설이다. 주인공이
되뇌는 의문을 곱씹어봐야 하고, 이성을 가장한 비이성적인 짓거리들을 보며 발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30년 전쯤에 쓰인 소설을 보며 자꾸만 오늘의 한국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곳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광대이고 미친놈일 뿐이야. 당신은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인간이야. 1마일쯤 떨어진 곳에서도 네 놈의 냄새가 날 정도야. 당신은 늙은 거지같이 생겼어. 쓰레기를 주워 먹고사는 거지
말이야. 그들은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걸 원치 않아. 당신에겐 미래가 없어."(194쪽)
소설 속 화자와 그의 발언 속 '당신'이라는 인물이 현재 한국의 특정 인물을 환기시킨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비록 발췌는 위의
구절 하나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소설의 내용과 함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소다. (가독성과 작품성에 도대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건가?)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히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형상화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작년 초에 보고 1년 몇 개월 만에 다시 보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여전히 나를 (역자인 왕은철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불편하게 만들고, 사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든 내 변덕스러운
이성을 얼얼하게
만들고 편협한 가치관을 뒤흔들어주는 작품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고, 쿳시의 소설이 정확하게 그러한 역할을 한다.
폴더 안에 폴더를 하나 덧붙인다. 아래 폴더엔 작년 초에 <야만을 기다리며>를 보고 쓴 내용이 있다. 소설은 독서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좋은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비록 정교한 리뷰가 아닐지라도, 그냥 생각나는 것들만 주욱 나열하는 식의 감상일 뿐이라도, 기록해두는 것은 현재를 위해서도 나중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작년꺼 열기
다음은 <야만을 기다리며>의 말미(273-274쪽)에 있는 "옮긴이의 말"의 일부다.
ㅡ 그렇다면 왜,
치안판사(*소설 주인공)나 쿳시(*작가)는 그들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쿳시 자신의 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내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전자는 죨
대령(*치안판사와 대립하는 인물)의 편에 서서 자신이 늘 해온 직무를 수행하면 여생을 편히 살 텐데, 그걸 마다하고 온갖 고초를
자진해서 겪은 후 자기고백적인, 아니 자기고백적이어서 자신에게 더욱 득이 될 것이 없는 얘기를 하는 치안판사를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고, 후자는 톨스토이, 루소, 도스또엡스키에 관한 에세이에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에 관한
문제를 반추하고 또 반추하는 자신을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에 따르면, 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고, 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두 질문에 대한 쿳시의
'플라토닉한' 답변은 왜, 쿳시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때로는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하는지, 그리고
왜, 쿳시가 그러한 내러티브에 매달리면서 자신의 고뇌를 투영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의나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쿳시의 말은 궁극적으로 글쓰기가 윤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잘 말해준다.
부커상 수상작인 <추락>을 심사했던 보이드 톤킨(Boyd Tonkin)은
<추락>에 대해 "아이스 피켈(ice-axe)로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었다"라고 표현했다. 과연, 나는 아이스 피켈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몰랐으나 <추락>을 읽고나서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느낌만 가지고 비교해
봤을 때,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조금 그 세기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초반부만 해도 대단히 유사한
느낌이었으나 중반으로 갈수록 그 느낌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고 대단히 오묘한 느낌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유머였다.
하지만 단순히 유머라고 표현해버리면 내 느낌이 왜곡되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풍자나 아이러니나 조소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색과 광기가 공존하는 유머랄까. 다음은 그것이 절정을 발하는 부분이다.
ㅡ 이번에는 다음
것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봅시다. 아, 단어 하나만이 달랑 쓰여 있구먼, 야만인들의 말로 전쟁이 라는 말이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다른 의미들도 있소. 그건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렇게 위아래를 뒤집어 읽으면 정의라 는 말이 되기도 하오. 어느
것을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소. 그게 야만인들이 교활한 이유요. 그건 다른 나뭇조각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오. (190쪽)
소설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실 이런 발췌 구절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이 부분이 어떻게 절정이 될 수 있는지는 소설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많지 않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글의 초반에 발췌한,
소설에서 보여지는 '윤리(혹은 진실이나 정의)'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네 심연을 밝혀주기 (밝혀보려 애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자신만의 에티카(윤리학)를 말하며 문학이 종언하지 않았음을(종언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지만, 실은 윤리라는 것은 몰락했건 아니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소설이
문학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 망각했거나 자연스럽게 모른 척했던 어떤 '윤리(윤리 시간에 배우는 윤리
말고)'를, 고스라니 드러내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번쯤 해봄직한 질문.
ㅡ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교양이나 오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있는 경험은 한정되어 있고, 더군다나 극한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 예고 없이 침입하는 일종의 이물(異物)이다. 그것을 그냥
배제해버리고 말 것인지 아니면 잘 다듬어서 진짜와 같은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 것인지는 독자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中)
내가 만약 치안판사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내 성정에, 그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새삼, "한 나라가 위대한 작가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정부를 갖는 것과 같다"는 러시아 작가 솔제니찐의 말이 와
닿는다. 우리나라엔 언제쯤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까. //
+ 겐이치로 형님이 짱이네 멋지네, 라는 소리를 이번 주에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은 아쉽게도 하위권에 랭크. 그의 소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 트위터에서 @gombimbee 님과 겐이치로 형님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내가 그의 작품을 읽으면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 "
뭔가, 잘게 오려진 무수히 많은 색종이가 공중에 떠다니는 느낌? ㅎ 색깔은 모두
비비드하고, 결국엔 모두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고요. <야구>도, "골때리는" 색종이들이 막 떠다니다가 한곳에
안착하더라고요." 너무 마음에 드는 표현이라 그만 사랑한다고 고백할 뻔했... ( -_-);
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Anonymous - 2010/05/07 00:09
답글삭제방금 다녀갔구나. 음. 우리가 언제 마지막으로 봤더라? 암튼 똑같이 지내요. 으흐흐, 아주 만족스러움. 접때 커피숍에서 했던 약속(기억하려나? ㅎㅎ)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까지는 아니고 그냥 꾸준히 그러고 있어요. 그나저나 이제 점점 '그날'이 다가오고 있겠구나. 묘한 기분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