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2월 27일 토요일

2월 20일 ~ 2월 28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3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5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NEW)

6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7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8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2)
9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0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1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2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4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5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6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1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19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0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1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25일) 하 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와 김영하의 <검은 꽃>이 떠올랐다. 김연수 소설의 경우, 연재본은 연재본 대로 단행본은 단행본 대로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있고, 김영하 소설의 경우... 서문과 친구의 말에 의하면 후반부는 어설픈 중남미 스타일이라고 했던가. 둘 다 이미 두 번씩 읽은 소설이지만 올해 내로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하 진의 <전쟁쓰레기>처럼 굳이 소설이라는 서사 장르가 아니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에는 크게 끌리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쓴 이야기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단한 에너지가 있다. <기다림> 때도 그랬거니와, <전쟁쓰레기>를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휘몰아치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이를테면 소설의 고전적 미덕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외국인이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아닌가. 읽는 내내 도대체 이 작가는 자료 조사를 얼마나 꼼꼼이 했을까 하는 생각을 그치지 않았다. 원서를 찾아보면 되긴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엔 하 진이 참조했다는 도서목록이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다. 왕은철 교수가 직접 번역한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내 섣부른 추측이겠지 뭐... <기다림>과 <전쟁쓰레기>는 비슷한 듯 다른 소설이며, 각각의 주인공들은 다른 듯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작품은 각각 2000년, 2005년 펜/포크너상 수상작이다.



리스트 일차 목표였던 30위까지 작성하기 위해 앞으로 남은 소설 아홉 편.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돌고 돌아


 다른 두 나라의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만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보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없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영어로 소설 쓰는 중국 태생 하진의 <전쟁쓰레기>에 나오는 주인공 중국인과, 한국에서 한국어로 소설 쓰는 한국 태생 김연수의 단편 "뿌넝숴"에 나오는 주인공 중국인은 대단히 비슷한 시기에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만 시기상 만났을 가망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소설은 그런 추측들이 쌓이고 쌓여 탄생하는 거겠지.

 미루고 미뤄왔던 하진의 <전쟁쓰레기>를 (처음 접한 지 3년 만에 드디어) 읽을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 번역본이 나오기 전인 2007년 번역 수업 시간에 처음 접하게 됐는데(물론 당시엔 삼분의 일 정도밖에 보지 못했고), 거제 포로수용소 얘기도 있고 해서 당장 좀 읽어볼 예정.

 뜬금없는 얘기기는 하지만, 2년 전까지 김연수의 골수팬으로서, 지금까지 김연수 최고의 작품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고 생각한다. (올해 내로 다시 읽어봐야지.)

 김연수의 번역본 중에 하진이 쓴 <기다림>이 있어서 하진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하진이 쓴 작품 대부분을 왕은철이 번역하여 왕은철이라는 번역가(겸 교수)를 알게 되었으며 왕은철이 번역한 작품을 찾아 읽다가 쿳시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거지.


 작년에 한국에 출간된 소설 중 기대중인 작품들을 당장(신간으로) 사지는 못하고 목록만 만들어뒀는데 온라인 헌책방을 뒤적이다가 그중 세 권을 발견하여 구입했다. 오로지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 "여러분 책장에 꽂혀 있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옆자리를 좀 비워놓으시라"는 추천사 때문에 사샤 스타니시치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몇몇 리뷰들에서 받은 인상만으로, 그러니까 순전히 감으로 토마스 브루시히의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 물론 이 소설 세 편 다 내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는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읽힐지는 모를(그러나 반드시 읽힐), 현재로선 그런 처지.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가 헌책방 사정상 값작스레 사라진 바람에 못 와서 좀 아쉬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저렴한 가격에 만나겠지 뭐.


2010년 2월 18일 목요일

빌리티스의 노래


"볼라뇨는 성애 문학과 고딕 문학에도 뚜렷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처음 훔친 책이 피에르 루이스의 얇은 책이라는 것은 기억했지만 그것이 <아프로디테>인지 <빌리티스의 노래>인지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다."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57쪽)

"교수는 책을 보더니 혀를 차더군요. <빌리티스의 노래>가 근대적인 성애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국에서 출판됐을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빌리티스의 노래>는 피에르 루이스가 쓴 산문시집입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306,307쪽)


ㅡ 이렇게 만나는 거지.


2월 10일 ~ 2월 19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3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5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NEW)

6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NEW)

7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NEW)

8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9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0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1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2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4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5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1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1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19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0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10일) <슬로우 맨>에 대해선 여기서 떠오르는 대로 주절거렸으니... 쿳시의 경우, 나이가 들어감에따라 이전 작품들에서 보였던 강렬함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쵸큼 아쉬움. 나이보다는 이주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작년도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써머타임>을 기대해봐야징.

 

(14일) 좀 더 알았으면 좀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읽는 내내 들었다.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보고 나서 든 생각과 유사하다.) 세군에 의하면 여기 나온 인물들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실제 작가들의 패러디적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그러면서 한국 작가들의 예를 들기도 했고)... 음, 아무튼 궁금한 점이 많다. 예전에 세군과 대화중에, 굳이 자주 만나거나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내 과'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는 식의 얘기를 했는데, 나에겐 볼라뇨가 그렇다.  


(16일) 아주 들뜬 맘으로 읽기 시작한 <칠레의 밤>, 다시 읽어야겠다. 다른 건 모르겠고, 볼라뇨는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하며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이 정확하게 있는 것 같고, 그중에 후자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 (18일)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석양처럼 붉고 어둡게 빛나는 칠레의 밤. 처음 볼 때 147쪽의 "습관은 모든 조심스러움을 무디게 하고 일상은 모든 끔찍함을 누그러뜨리는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 너무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놓친 게 한두 개가 아닐 거야. 나는 시를 좀 봐야 해. <신곡>도 좀 제대로 봐야... (에휴)

 

 

2010년 2월 17일 수요일

볼라뇨를 읽으며


 볼라뇨는,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내에 담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들을,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닐 수 있는 가장 최대치의 개념으로 담아내고자 애쓴 작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고작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과 <칠레의 밤> 두 개밖에 보지 못했지만... 소설을 내용과 형식으로, (두부 말고) 떡 자르듯이 깔끔하게 잘라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굳이 그렇게 해보자면, 개인적으로 볼라뇨 소설의 내용은 어려웠고 형식은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상식 혹은 교양 내지는 문학(학문)의 차원에서 해설을 필요로 하는 소설을 그닥 좋아하지는 않지만, 볼라뇨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니 어쩐지 소설을 탓하기보단 내 무지를 탓하게 된다. 그가 소설에서 '이야기'라는 요소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아니, 어쩌면 내 오독이겠지만, 심지어는 자꾸만 그것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여서 좋았다. 그래서 멋지고 준수한 '소설에 관한 글'들이 볼라뇨의 소설에 대해 말하려고 해봤자 소설의 핵심에는 다다르지 못한 채 그 주변부만 뱅글뱅글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결국 <칠레의 밤> 말미에 있는 "옮긴이의 말"이나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에 실린 <칠레의 밤> 서평 세 편을 읽어봤자 내 가려운 등은 긁을 수가 없었다. 아, 간지러워라. 간지러운 사람이 등을 긁어야지 뭐. 그나저나 한국에서 볼라뇨가 얼마나 먹힐까. 대표작이라는 <야만스러운 탐정들>이나 <2666>을 접해보지 못해 알 수 없지만, 쿳시도 모호(?)하다는 이유로 안 먹히는 판에 볼라뇨가 과연 먹힐 수 있을까. 볼라뇨가 쿳시보다 몇 배는 모호하게 느껴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앞으로 볼라뇨의 책들은 꾸준히 출간될 예정이니 다음에 출간될 책을 기다려야지. 

 <칠레의 밤> 119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 전개, 뭐랄까, 되게 막 신난다. 나는 아직 멀었다는 것을 이런 데서 깨닫는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렇네요, 내가 성자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장군이 내게 말했다. 내가 책을 몇 권 썼는지 아시오? 저는 일순 얼어붙어 버렸습니다. 내가 페어웰에게 말했다. 전혀 모르는 일이었으니까요. 서너 권 썼지, 페어웰이 확신에 차 말했다. 어쨌든 저는 몰랐기 때문에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세 권이오, 장군이 말했다."


2010년 2월 9일 화요일

투덜투덜


1. 부산 내려가면서 볼라뇨의 <칠레의 밤>을 보려고 했으나, 출판사에 확인해본 결과 다음주쯤 돼야 서점에 깔린다고. (젝일) 미리 책을 받아본 친구님께 연락해서 빌려보려 했으나 이미 다른 친구에게 빌려줬다며... (어흙) 온라인 서점에 주문해봤자 다음주에 받아볼 수 있으니 이번주에 보긴 글렀구나. (끄응) 어차피 봐야할 책은 천지에 쌓이고 널렸으니.

2. 이마미치 도모노부가 쓰고 안티쿠스에서 출간된 <단테 신곡 강의>라는 책이 오늘 (2월 10일)알라딘에서 반값에 판매되고 있다. http://www.aladdin.co.kr/shop/wproduct.aspx?ISBN=8992801033 단테의 <신곡>을 볼 일이 있어 작년 말쯤에 위의 책을 정가에 가까운 가격을 주고 샀었는데... (왠지 쫌 억울;) 이것 참, 억울하다고 한 권 더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에힝. 하여간 두껍고 비싼 책은 안 사고 버팅기다보면 이런 할인 판매의 도마 위에 오르게 되는 운명인가 보다 쩝. <모비 딕>도 안 사고 버티면 언젠간...;;


쿳시, 슬로우 맨


 쿳시의 <슬로우 맨>을 다룬 "책읽는밤"을 다시 보았다.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대체로 '공감'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공감하거나, 혹은 예비적으로 체험하거나. 인물과 그 인물이 처한 상황에 공감하고, 인물들이 겪는 사건들에 공감하고.

 그러나 쿳시 소설의 특징 중 하나는 공감할 수 없음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공감하지 못하도록 작가가 끊임없이 이런저런 장치를 만들어 낸다. 쿳시의 거의 모든 소설에서 다뤄지는 주제가 '사랑'이다. 남녀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일 수도 있겠고. 하지만 작가가 사랑에 대해 쓰는 이유는 독자들이 공감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이 알고, 행하고 있는 사랑이 정말 사랑인지, 진정한 사랑인지 생각하게끔 하기 위해서이다. 

 <슬로우 맨>도 얼핏 보면 다리가 잘린 노인과 그를 돌봐주는 간호사 사이의 사랑에 대해 얘기하는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공감할 준비는 되어 있어!) 결국 노인이 그 여자에게 고백까지 하기는 하지만 그 와중에 무수한 생각과 고민들이 존재한다. 자기가 하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맞는지, 단순한 욕망인지, 사랑과 욕망을 어떻게 구별해야 하는지, 도대체 이게 뭔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리고 이와 연관시켜 던진 질문이 '노인'에 대한 것이다. 우리가 일반적이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노인'에 대한 고정관념 내지는 편견에 대해서 균열을 주고자 애를 쓴다. 코스텔로의 도움으로 한 여자와 실제적인 섹스를 하기도 하고(노인도 섹스가 필요해!) 무려 육십이나 먹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삶에 대해, 여자에 대해, 그밖의 각종 문제들에 대해 고민하는 모습을 실질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결국 독자들은 장애를 가진 노인을 보며 자신이 기존에 갖고 있던 '상실' 내지는 '노년'에 대해 공감하는 차원에서 머무르고 만다. 소설을 보고 공감하는 건 독자의 자유이고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지만, 그건 어쩌면 작가가 제일 바라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책읽는밤"에서 좀 어이없었던 부분. 왕은철 교수가 이 소설은 리얼리즘이 아니다는 식의 언급을 했을 때 탁석산이 했던 멘트. 어차피 소설은 픽션이고 허구의 이야기이다. 그러면서 해리포터 예를 들다니... 대본에 따라 말한 건지, 아니면 자기 실제 생각을 말한 건지 모르겠으나, 무려 철학자랍시고 공부 좀 했다고, 쫌 안다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냥, 좀, 없어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굳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의식하고 등장시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 같지는 않지만,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등장했을 때 개인적으로는 소설에서 활기가 샘솟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가가 자신의 분신 같은 존재를 작품에 아무런 개연성 없이 등장시킨 의도가 확연하게 드러나진 않지만, 어쩌면 기존의 작품에서처럼 의도를 모호하게 만들고 일반적 관념에 의문을 부여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 굉장히 재미있게 읽혔다. 사랑, 노년, 상실과 관련하여 지지부진하게 전개됐을지도 모를 소설이 코스텔로 덕분에 살아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이 작품 속에서 코스텔로를 비난(?)하는 부분도 재미있었고.) 어쨌거나 그럼 결국 작가가 작품을 살렸다는 얘기...?

 규칙에 어긋나는 쌍따옴표의 사용법도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인 말에서도 쌍따옴표를 사용하고, 자신이 했던 생각들에도 쌍따옴표를 사용한다. 말하려고 했으나 실제로는 말하지 않았던 그런 생각들을 둘러싼 쌍따옴표. 그리고 그 뒤에 곧바로 등장하는, 원래 생각과는 상반되는 실제의 말을 둘러싼 쌍따옴표. 우리가 생각한 그대로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시각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런 점과 관련하여 콘래드의 <비밀요원>이 문득 떠올랐다. (조금 다른 문제인가, 기억이 잘...;)

 어쨌거나 강영숙이 말한 것처럼 쿳시의 다른 소설에 비해 굉장히 말랑말랑한 소설인 것은 분명하다. 굳이 비교하자면, 화자의 어조가 <야만인을 기다리며>와 그나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긴 했으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 스토리 탓도 있겠고, 소설의 지역적 배경 탓도 있을 터이며, 작가의 나이...는 탓하지 말하야지. 


 조금 다른 얘기기는 하지만, 요새 시대에 60대를 '노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얼마전에 친구가 했던 얘기인데, 요새 한국의 60대는 충분히 정정하다. 술 마시면 싸움도 잘 하고, 그래서 경찰서에도 붙들려가고. 일반 사오십 대 중년, 어쩌면 이삼십 대 청년과도 크게 다를 바 없다.


2010년 2월 8일 월요일

2월 1일 ~ 2월 9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NEW)
2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3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NEW)
4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5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6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7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8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9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0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1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2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14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1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16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17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6일) 3년 전에 처음 <제5도살장>을 봤을 때의 느낌을 거의 그대로 만끽한 것 같다. 많은 멋진 소설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결말에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다. 보네거트 형님 스스로도 <제5도살장>에는 A 플러스의 점수를 부여하긴 했지만, 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 소설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는 소설 형식과 이야기와 주제가 가장 적절하게 호응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뭐... 그렇고 저렇고를 다 떠나서 보네거트 형님은 정말 멋진 사람이다.

(8일) 매큐언의 작품들을 보며 느꼈던 아주 미묘한 머뭇거림을 쿳시의 <추락>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거리감이었다. 매큐언의 작품을 읽으면 거의 늘 독자(나)와 작품 사이에 일정 정도의 거리감이 유지됐다. 반면 쿳시의 작품을 읽으면 독자(나)와 작품 사이에 거리감이 사라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작품 속에 존재하게 된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 것 같다.) 어떤 의미에서건 나를 공황상태에 빠트리는 작품은 무조건 사랑스럽다. 점점 오락화 위로화 되어가고 있는 (한국) 소설판에서 여전히 소설이 존재할 가치가 있다면, 구체적으로 설명하긴 힘들지만, 그건 앞서 언급한 '공황상태'와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볼라뇨의 <칠레의 밤>이 출간됐다. 200페이지도 안 되는 짧은 소설이다. 부산에 내려갈 때 보면 되겠다.

+ <슬로우 맨>을 다 보진 못했지만 궁금한 마음에 "책 읽는 밤"을 인터넷 실시간 보기로 시청했다. 쿳시, 혹은 쿳시의 작품이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과연 쿳시의 작품들이 열린책들이나 문학동네나 민음사에서 꾸준히 번역되어 나왔으면 어땠을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혼자 한번 해봤다. 소설에 있어서 인기나 대중성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겠지만, 대형 출판사에서 출간됐어도 지금처럼 인지도가 없었을까? (그의 작품이 무려 10편이나 번역됐는데?) 아니면, 어차피 그런 숙명을 가진 작가이고, 또 작품인가. 패널로 나온 소설가 강영숙이 쿳시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강영숙의 소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 후훗. 이렇게 돌고 도는 거지.


2010년 2월 5일 금요일

슬로우맨 책읽는밤


http://www.kbs.co.kr/1tv/sisa/talkbook/view/vod/1632934_30161.html


 "책 읽는 밤"에서 다음 주 월요일에 다룰 책이 쿳시 형님의 <슬로우 맨>이다. 출간됐다는 사실은 진작에 알고 있었는데 여직 못 보고 있... 어차피 집에 TV가 없으니 인터넷으로 다시보기를 해야 하는데, 그 전에 책을 읽어야 한다. 패널로 왕은철 교수가 나오지 않으면 말이 안 된다! 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왕 교수님 출연. 사진으로밖에 접한 적이 없는데 아무튼 쵸큼 설렘ㅋㅋ 개인적인 사정으로 요새 책을 잘 못 보고 있는데, 실은 글이 머릿속에 잘 안 들어오고 있는데, 아무튼 빨리 원래 독서 모드를 찾았으면 좋겠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속상한 작가가 몇 명 되는데 그중 한 명이 쿳시 형님이다. 방송을 타고 나면 그의 작품들이 좀 알려질 수 있을까나. 부지런한 왕 교수님 덕분에 쿳시의 작품 거의 전부를 준수한 한국어로 읽을 수 있는데, 이번 방송을 기회로 많은 독자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판매량 부진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쿳시 책 펴내주는 들녘 출판사에도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