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29일 목요일
2010년 7월 20일 화요일
7월 11일 ~ 7월 20일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5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6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7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8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9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10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1위. 로베르토 볼라뇨, <먼 별>(1996)_[100708] (2)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3위.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1999)_[100630] [100706] (2)
14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5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6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7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_[100521] (1)
18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9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20위. 니시오 이신, <잘린머리 사이클>(2002)_[100609] (1)
21위. 데이비드 로지, <아주 작은 세상>(1984)_[100618] (1)
22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23위. 윌리엄 백퍼드, <바텍>(1816)_[100713](1)
24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25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6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7위. 도스토예프스키, <지하로부터의 수기>(1864)_[100620] [100711] (2)
28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30위. 존 파울즈, <마법사>(1966,1977)_[100607] (1)
31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32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3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34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3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3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3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8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9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11일) 로쟈님의 도스토예프스키 강의를 통해 <지하로부터의 수기>가 왜 씌었는지 그 속에 담긴 구절들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인지, 더불어 도선생 후기 소설들과의 관계에 비추어 봐을 때 이 소설의 중요성 등에 대해 듣기는 했으나 재미없는 건 어쩔 수 없다. 2부는 그럭저럭 볼 만했으나 1부는 시종일관 졸렸다. 과대망상에 자의식 과잉의 중2병 캐릭터의 독백을 보는 건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리 그 속에 뜻깊은 무언가가 담겨 있을 지라도. 톨스토이를 존경하며 도스토예프스키를 까댔음에도 도선생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나보코프는 심지어 1부는 소설도 아니라고 했다고...
(13일) 두어 달쯤 전에 친구가 빌려준 책인데 안 보고 있다가 <먼 별>에 나와있길래 어떤 이야기인가 싶어서 봤다. 이야기로서의, 그러니까 책 뒤표지에 나와 있듯 "프랑스 비평가와 독자들이 선정한 <이상적인 도서관Bibliotheques ideales>의 장서 목록 중에서, '환상과 경이' 부문 베스트 1위를 차지"할 만큼 이야기의 매력은 풍부했지만 소설로서 그리 큰 매력은 못 느꼈다. (아래는 보르헤스가 <바텍>에 관한 글을 쓰면서 했던 착각에 대하여)
보르헤스의 글을 읽다가
보르헤스의 <만리장성과 책들>에는 "윌리엄 백퍼드의 <바테크>에 관하여"라는 짧은 글이 있다. (물론 <바테크>와 <바텍>은 같은 책.) <바텍>을 다 본 후 보르헤스가 쓴 글을 흥미롭게 읽던 중에 "어?"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소설의 줄거리를 언급하는 부분이었다.
"탐욕에 눈이 멀어 버린 칼리프는 상인의 목소리에 무릎을 꿇고 만다. 상인은 마흔 명의 인신 공양을 요구한다. 그로부터 피비린내 나는 여러 해가 흐른다." (<만리장성과 책들>, 242쪽)
문제는 보는 것처럼 진하게 표시해둔 저 마흔 명. 분명 정영목 선생이 옮기고 열림원들에서 출간된 <바테크>에선 마흔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달하는 칼리프여! 내 목이 바짝바짝 타고 있으니 내 목마름을 완전히 달래기 전에는 문을 열 수 없다. 아이들 쉰 명의 피를 다오. 그대의 대신과 고관들이 낳은 가장 아름다운 아들들 가운데서 쉰 명을 뽑아야 한다." (<바텍>, 34쪽)
이후에도 이 소설에선 '쉰 명'에 대한 언급이 몇 차례 더 나온 걸로 봐서 쉰 명이 맞는 것 같은데 보르헤스는 어쩌다 마흔 명이라고 착각했을까? 사실 별로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쩐지 대가의 이런 사소한 실수를 발견하는 것도 독서의 한 재미인 것 같다.
+ 열린책들에 문의한 결과 보르헤스가 착각한 것이 맞고 다른 나라 번역본에서도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었다고 한다. 새 번역본이 나올 때 수정해서 각주로 처리한다고 했다.
(14일) <먼 별>을 다시 읽었다. 이 소설에는 많은 이야기와 작가와 시인과 작품이 등장하는데, 그걸 이용해서 재미있는 글을 한번 써봐야겠다. 몇 달 후 출간될 볼라뇨의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일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는데 훌륭한 작가는 유머를 정말 잘 구사한다. 그냥 단순히 하하호호 웃기는 그런 유머 말고. 웃음과 씁쓸함을 동시에 유발시키는 유머.
+ 얀 마텔의 <셀프>를 읽다가 말았다. 지금까지 나름대로의 소설 읽기 원칙이라면 (처음 읽는 작품에 한해) 한번 읽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보자! 였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정말 오랫동안 읽힌 고전이 아니라면 굳이 지루함을 견뎌내면서까지 읽고 싶지는 않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접하지 못한 다른 책을 보는 게 낫지. <파이 이야기>도 그렇거니와, 얀 마텔은 (소설이 품고 있는 에너지의 교류 측면에서) 나랑은 별로 안 맞는 작가인 것 같다.
2010년 7월 9일 금요일
7월 1일 ~ 7월 1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5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6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7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8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9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10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1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3위.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1999)_[100630] [100706] (2)
14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5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6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_[100521] (1)
17위. 로베르토 볼라뇨, <먼 별>(1996)_[100708] (1)
18위.
니시오 이신, <잘린머리 사이클>(2002)_[100609] (1)
19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20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21위.
데이비드 로지, <아주 작은
세상>(1984)_[100618] (1)
22위.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_[100620] (1)
23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24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25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27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8위. 존 파울즈, <마법사>(1966,1977)_[100607] (1)
29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30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31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32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33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34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3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3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7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8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6일) 볼라뇨의 <부적>을 다시 봤다. 소설 내용은 여전히 어두침침한 느낌이었지만 화장실 타일 위의 상현달 혹은 하현달의 달빛이 조금은 더 선명해진 것 같다. 2장에서 주인공은 멕시코 국립 자치 대학교 인문대학을 돌며 자발적으로 일을 했는데 이 부분에서 문득 김연수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나오는 한 인물이 떠올랐다. 처음 볼 땐 별로 인식하지 못하고 넘어간 부분이 많았는데 그중 160쪽에 나오는 "안데스 산맥의 식인종 럭비 선수들"에 관련된 내용도 마찬가지였다. 책을 보다가 말고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나 싶어 검색해보았더니 실제 있었던 일. (다큐멘터리 영화를 포함해) 관련 영화도 두 편이나 있었다. 이제 <먼 별>을 봐야지.
(8일) 볼라뇨의 <먼 별>을 봤다. 이전까지 본 세 편의 작품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읽혔다. 반면 완성도의 측면에선 상대적으로 살짝 못 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다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카를로스 비더를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이라고 봤을 때 중반부에 나온 후안 스테인과 디에고 소토의 이야기는 조금 동떨어진 내용이 아닌가 싶다. 초반부와 후반부는 범죄소설적 스타일 덕분에 흥미진진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내가 느낀 이 소설의 진짜 매력은 옮긴이의 말에 나와 있는 것처럼 작가의 "방대하고 탐닉적인 독서광의 면모"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는 점이었다. 볼라뇨 같은 독서광이 되고 싶다.) 어찌 됐건 이 소설 역시 분량이 적은 편이니 이번 달 내로 다시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2010년 6월 30일 수요일
6월 21일 ~ 6월 3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5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6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7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8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9 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10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1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_[100521] (1)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3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4위. 로베르토 볼라뇨, <부적>(1999)_[100630] (1)
15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6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7위.
니시오 이신, <잘린머리 사이클>(2002)_[100609] (1)
18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9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20위. 데이비드 로지, <아주 작은
세상>(1984)_[100618] (1)
21위.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_[100620] (1)
22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23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24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26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7위. 존 파울즈, <마법사>(1966,1977)_[100607] (1)
28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9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30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31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32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3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34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3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6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7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30일) 서점에서 <먼 별>과 <부적> 중 무엇을 먼저 볼까 훑어보다가 첫 구절이 인상적이라 <부적>을 먼저 보게 되었다. 바로, "이 이야기는 공포물이다. 탐정 소설, 누아르 소설, 호러 소설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말하는 사람이 나 자신이고, 그래서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잔혹한 범죄 이야기다."라는 구절. 하지만 이 소설이 "잔혹한 범죄 이야기"라는 점은, 아후벨이 그린 <부적>의 책 표지만큼 선명하게 와 닿지 않았다. 그것은 멕시코(및 라틴 아메리카) 역사(문학사)에 대한 무지 때문일 것이고, 시공을 무시하는 작가의 초현실적인 서사 기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며, 현실과 환상을 엮는 수많은 은유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칠레의 밤> 때와 마찬가지로, 한 번 더 읽어봐야겠다.) 사실 이 작품은, 장르의 특성상 소설이라 불리는 게 당연한 일이겠지만, 다 읽고나면 소설에 대한 감흥보다는 시적인 인상이 더 강하게 남는 소설이다.
+ 매번 택배 이사만 하다가 처음으로 용달차를 불러서 이사를 했다. 차를 타고 1년 반 이상 오르락내리락 하는 동네를 떠나는데 기분이 참 묘했다. 미운 정이든 고운 정이든 정든 곳에서 멀어지는 건 늘 아련한 기운에 휩싸이게 한다. 그러니까 요는, 이사 하느라 책을 거의 못 봤다는 소리. 7월 1일부터는 다시 열독, 열작 모드로 살아야지.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6월 11일 ~ 6월 2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5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6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7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8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9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10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1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_[100521] (1)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3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4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5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6위.
니시오 이신, <잘린머리 사이클>(2002)_[100609] (1)
17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8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9위. 데이비드 로지, <아주 작은 세상>(1984)_[100618] (1)
20위.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1864)_[100620] (1)
21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22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23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25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6위. 존 파울즈, <마법사>(1966,1977)_[100607] (1)
27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8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9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30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31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32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3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34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5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6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데이비드 로지, <아주 작은 세상>
(21일) 절판된 데이비드 로지의 <아주 작은 세상>을 헌책방에서 발견하고 단박에 구입한 건, 작년 마음산책에서 이 책이
<교수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됐기 때문이었다. 어떤 책이든, 한 번 절판됐다가 시간이 흐른 후 재출간 되는 책이라면
관심이 많다. 그만한 가치와 독자 수요가 있기 때문에 재출간된다는 나름의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재출간되는 책이 모두 내
기대를 충족시켜준다는 보장은 없고, 아쉽게도 이 책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고.)
이야기의 배경 자체가
아카데믹하다는 점(영문학 학부 전공자 정도의 상식이나 문학 이론에 관심 있는 사람이 보면 좀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듯), 그리고 그 이야기를 파편적으로 구조화했다는 점을 빼면 이 소설에선 가독성 좋은 대중소설의 향취가 많이
묻어난다. 후반부에는 심지어 '막장드라마'의 기운이 느껴지도 했다. 하지만 앞에 언급한 두 가지 이유가 크게 작용한 소설이라...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말이냐!)
이 소설이 그닥 맘에 들지 않는 이유는 (제목(원제는 Small World)을 고려한 건지 어떤 건지) 이야기 사이에 너무 많은 작위와 우연이 삽입됐기 때문이다. (세상이 얼마나 작은가 하는 점을 말하려고 했다고는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이야기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실 이런 식의 파편적 구조라면 조만간 재출간될 E.L.닥터로우의 <래그타임>이 이야기 자체도 훨씬 풍성하고 내적 논리도 단단하다. 물론 주제나 이야기 방식은 좀 다르다고 기억하지만. (이쯤에서 예전에 써둔 간단한 메모를 첨부.)
E.L. 닥터로우, <래그타임>
E.L. 닥터로우의 <래그타임>을 읽었다. 1975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책인데 우리나라에선 1992년에 번역돼 나왔다. 왕(은)철 교수가 번역했다. (* 당시 내가 이 책을 본 이유는 왕은철 교수가 번역했다는 이유가 전부다.) 역자의 미국 친구에 의하면 이 소설에는 "돈, 정치, 문화, 섹스, 페미니즘, 아나키즘, 인종차별, 서정, 폭력, 노동운동, 역사, 정치, 로맨스, ... 등등 무엇이나 다" 들어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고...
이 소설은 작가가 표현하려 하는 시공(20세기 초반 미국)에, 여러 인물이 대등한 비율로 등장하여 자기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들어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여기서 매력적인 점은 언뜻 아무 관련이 없는 각 인물들이 교묘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더불어 참신하다고 느낀 점은 각 인물들이 작가에 의해 순수 창작되기도 한 반면 역사상 실재한 인물이기도 한 사실. 실재 사건이나 인물이 나타남에도 이 소설이 역사소설이라는 카테고리에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비유하자면 그런 것들이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데 자전거에서 두 바퀴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보조 바퀴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 두 바퀴 역할을 하는 중심 이야기는 없다. 각각의 이야기가 마치 톱니바퀴처럼 연결되어 맞물려 돌아간다. 중심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한 이야기에 집중해서 볼 수 없다는 점은 단점이 될 수 있겠지만, 각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만나게 될지, 각 이야기가 어떻게 연결될지 궁금하게 만드는 점은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다음은 이 소설의 내용과 형식을 다 포괄해서 담을 수 있는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얼음 위에는 스케이트 날 자국이 겹겹으로 나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노인이나 스케이트 타기를 두려워하는 가족들을 롤러가 달린 의자에 태우고 살포시 밀고 다녔다. 그러나 소년의 눈에는 사람들이 스케이트를 타면서 만드는 자국만이 보였다. 좀전에 만들어진 스케이트 자국이 다른 자국에 의해 재빨리 지워지고 다시 그 자국이 금세 지워지며 또 다른 자국이 만들어지는 그런 모습을 바라보면서 소년은 삶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114p)
다음 작가가 소설을 쓰는 원동력이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대목.
"아버지는 늘 자기 가족은 축복받은 가족이라고 생각해 왔다. 바로 그것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가 하는 일이란 상황이 요구하는 그런 일일 뿐이었다. 모든 것을 콜하우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북극에도 가보았고 아프리카에도 가보았고 필리핀에도 가보았다. 그리고 서부로도 가보았다. 그는 그것의 의미를 찾아보려고 노력했다. 보면 볼수록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이 세상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곳곳에서 열리는 학술대회가 주요 배경이라 여러 도시와 지역에 대한 묘사가 많은 편인데, 여기에 나오는 곳들 중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다. 이를테면 알랭 드 보통이 쓴 <공항에서 일주일>의 배경이 되는 히드로 공항이라든지, 오르한 파묵의 <검은 책>이나 <이스탄불>의 배경이 된 이스탄불이라든지, 더 말할 것도 없는 그리스의 이곳저곳...
올 초에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의 기교>라는 책도 번역돼 나왔는데 언제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도스토예프스키, <지하생활자의 수기>
(20일) 7월부터 시작되는 로쟈님의 도선생 강좌에 대비하는 마음으로 우선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봤다. 예전에도 지루하다는 이유로 보다가 만 기억이 있는데 이번에도 (특히 1부에서) 여러 차례 졸음이 쏟아졌다. 겨우 참으면서 볼라치면 화자의 찌질한 면모에 그냥... 앙드레 지드는 이 소설을 가리켜 "도스토예프스키의 전작품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라고 평했는데, 아직 지드의 관점에 다다르려면 한참 먼 것 같다. 무엇보다 도선생의 작품 중 읽어본 게 많지 않기도 하고. 감상이라고 딱히 남길 말이 없어서 속상하다. (뭐냐 이 뻔뻔한 고백은!) 이번에는 문예출판사 판으로 봤는데 강좌를 듣고 열린책들 판으로 읽어본 뒤 다시 써봐야겠다.
이대로 접긴 아쉬워서 밑줄 그은 곳 일부를 발췌한다.
"그건 그렇고, 의젓한 인간이 진심으로 만족하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 화제란 도대체 무엇일까? / 답 ㅡ 자기 자신에 관한 것이다." (9쪽)
"당신들도 알아챘는지 모르겠지만, 가장 세련된 살륙자는 거의 한 사람 예외도 없이 최고의 문명인들"(34쪽)
"어느 누구의 추억 속에나 몇몇 절친한 치구 이외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아니 친구에게조차도 털어놓을 수 없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그것도 아주 은밀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일도 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고백하기 두려운 경우도 있다." (57쪽)
일전에 누군가 도스토예프스키와 라이트 노벨과의 상관관계에 대해 피상적이나마 언급한 걸 본 적이 있는데 이번에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읽으며 소설 속에 드문드문 묻어 있는 라노베적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둘 사이의 유사점을 면밀히 살펴보기에 난 도선생도 라노베도 아직 얼마 읽어보지 못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말인가!)
2010년 6월 9일 수요일
6월 1일 ~ 6월 1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5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6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7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8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9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10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1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_[100521] (1)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3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4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5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6위. 니시오 이신, <잘린머리 사이클>(2002)_[100609] (1)
17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8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9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20위. 존 파울즈, <마법사>(1966,1977)_[100607] (1)
21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23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24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5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6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7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8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9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30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31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32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3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4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존 파울즈, <마법사>
(7일) 존 파울즈는 <마법사>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전문적 관점에서는 조금도 만족스럽지 않았던 소설(처음에 평을 한 많은 사람들이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을 대부분의 독자가 늘 가장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받아들이게 되었다."(5쪽) 하지만 나는 아직 멀었는지 대부분의 독자들이 이 소설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읽어본 존 파울즈의 소설 중 가장 마음에 들지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부분부분 흥미로운 내용이 있기는 했으나 이렇게 긴 분량에 그 정도의 부분도 없으면 말이 안 되겠지. 소설의 구조가 중반을 넘어가야 보인다는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그 전까지 나온 내용들이 그다지 매력적이지도 않고 단순히 자기 과시적(자위적)이라는 느낌도 많이 받았다. 별로 할 말이 없다. 끝까지 봐야 한다는 일념으로 다 봤으나 중간에 그만뒀어도 괜찮을 뻔했다. 몇 년쯤 지난 후에야 다시 볼 마음이 생길지 어떨지... 이 소설을 좀 더 풍요롭게 보기 위해선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특히 <태풍>이나 <오셀로> 정도는 기본적으로) 봐줘야 하고 그리스-로마 신화나 호메로스의 작품과 친숙하면 좋을 듯하다.
니시오 이신, <잘린머리 사이클>
(9일) 다른 서사 장르(연극,드라마,영화,만화,애니메이션 등)로의 전환이 쉽지 않은 소설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 점에서 니시오 이신의 소설은 목에 가시 같은 존재였다. 내 취향이 아닌 게 분명하지만(만화나 애니메이션으로의 전환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파우스트 계열 작가들 중 빼놓고 넘어가기에는 걸리는 게 많은 작가였기 때문에. 그래서 데뷔작이자 "헛소리 시리즈"의 시작이며 23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인 <잘린머리 사이클>을 읽고 나서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계속 볼지, 아니면 이걸로 끝낼지. 그래야 개운할 것 같았다.
초반까지만 해도 이 책으로 끝일 줄 알았다. 하지만 중반, 종반으로 갈수록 이 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묘한 매력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신본격 미스터리"로서의 장르적인 재미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말장난(헛소리)의 수준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시 헛소리라면 이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분명 니시오 이신은 도선생의 <죄와 벌>에 나오는, "저는 헛소리를 좋아합니다. 헛소리란 게 참 놀라운 거거든요. 백마디 헛소리를 하다보면 언젠가는 진리에 도달하게 되지요."라는 구절을 알고 있을 것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이 명확했기에 가능한 헛소리라는 생각이 들었고, 난 그것이 마음에 들었다. 더불어, 과도하게 개인화된 개인들(독자들)에게 보내는 '청춘'에 대한 메시지까지 분명하게 녹아들어 있는 작품이었다. 특히 396쪽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사 - "...이 녀석을 좋아해요." (...) "그러니까, 그만 두세요" - 에선 소설의 정점을 찍어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긴박한 상황에서 이런 식의 대사를 구사해버리다니. 그런 말을 한 주인공에게도, 그런 전개를 택한 작가에게도 살짝 감동했다고나 할까... (수줍)
어쨌거나, 이로써 니시오 이신의 헛소리 시리즈를 계솔 볼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왜 뒤에 "OTL"을 붙이고 싶을까... ( -_-)a)
단편들
박민규, "루디"
ㅡ 예전에 박민규의 "깊"을 보고 어마무지하게 탄복한 적이 있는데 이 단편을 보고나서도 그랬다. 다들 조그마한 저수지에서 아웅다웅하는 동안 혼자 바다에서 노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이라는 느낌이었달까. 인터넷의 누군가는 박민규가 이제 세계문학을 한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박민규는 앞으로 한국 내 작가 중에서 (천박한 분류기는 하지만) 순수, 대중, 장르, 라노베 정도로 나뉜 한국 소설 독자들을 고루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작가가 될 가망성이 크다.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는, 진작부터 챙겨보았던 독문학 전공의 조효원 평론가가 박민규의 "루디"를 보고 이렇게 써놓기도 했다. 미래의 한국문학사가들에게 2010년 봄은 "루디"로 기억될 것이고, 그것은 "루디"가 이룬 수많은 성취 중 하나에 불과할 것이라고.
데니스 루헤인, "그웬을 만나기 전"
ㅡ 2년 만에 읽은 단편인데, 여전히 좋았다. 후쿠시마 료타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미를 발견해야 할 수고 없이도, 리얼리티와의 접점을 모색해야 할 필요 없이도, 그냥 그 자체로 충분히 매력적인 단편이다. 다음은 2년 전에 이 단편을 읽고 해둔 메모. // 얼마 전에 학교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어떤 책이 있나 두리번거리다가 데니스 루헤인의 단편집 <코로나도>에 있는 “그웬을 만나기 전”을 보았다. 책 뒤표지에 있는 소개 문구 때문이었다. 2005년에 발표되어 “올해의 미국 최고 단편선” 뿐만 아니라 “올해의 미국 미스테리 단편선”에까지 실렸다고 하니. 형식적인 면은 전부 주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초반엔 잘 안 읽혔다. 중반부터 속도감 있게 읽을 수 있었다. 선 채로 한 번 다 읽고 의자에 앉아 그 자리에서 한 번 더 봤다. 주제 그 자체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다. 주제를 드러내는 방식이 참 대단한 소설이었다. 그 소설집에 있는 다른 단편도 몇 편쯤 더 봤는데 이 소설만큼 강렬한 인상을 주는 소설은 없었다. //
2010년 5월 29일 토요일
5월 21일 ~ 5월 31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5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6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7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8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9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10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1위. 아모스 투투올라, <야자열매술꾼>_[100521] (1)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3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4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5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6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17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8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9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21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22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3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4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5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6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7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9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30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1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2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21일) 아모스 투투올라의 <야자열매술꾼>은 참 기상천외한 소설이다. 기상천외하다는 점에서 라블레의 <가르강튀아 /
팡타그뤼엘>이나 마이조 오타로의 <아수라 걸>이 함께 떠올랐다. 이 소설은 "죽은 술시중꾼만한 술시중꾼이 없기에
그를 찾아 나선 사나이의 이야기"(183p)다. 그런 가운데 '판타지한' 스토리가 연속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판타지 장르의 작품과 비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기존의 판타지 작품에는 보는 사람이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관습, 논리, 규칙들이 알게 모르게 내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소설에는 애시당초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의 얼개
자체가 다르다는 느낌이다. 그런 이유로 보는 시종일관 기발하고 참신하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낯설다는 느낌도 지울 수 없다.
역자가 "작품해설"란에 적어둔 것처럼 "구전 문학의 특징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번역을 시도했다는
점"(191p)은 탁월한 선택이었으나 그것이 입담 좋은 할아버지가 자신의 손자들에게 구성지게 풀어놓는 투였다면 더욱 좋을
뻔했다.
+열흘 동안 저 (얇은) 책 한 권밖에 못 봤다. 계획대로라면 존 파울즈의 <마법사>도 다 봤어야 하지만 아직 1권도 다 못 본 상태. 어제 밤부터 몸이 안 좋아서 오늘(5/30) 오후까지 계속 자다 깨다 했다. 그래도 뭘 좀 먹어야겠다 싶어 동네 죽집에서 죽을 사왔는데 3분의 1도 못 먹었다. 이렇게 사경을 헤맨 채(응?) 누워 있는 동안 경기지사 심상정 후보가 끝내 사퇴하고 말았다. 내가 비록 경기도민은 아니지만, 괜히 아팠던 게 아닌 것 같다. 기분도 꿀꿀한데 나중에 장원준과 김광현의 선발 맞대결이나 봐야겠다. 이제 오예스 먹으면서 허기 때우며 밤 새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그래도 5월이 끝나기 전까지 하려고 했던 일 딱 하나만은 무사히 끝내서 다행이다 싶다. 소설가 김연수의 말대로 인간의 의지만큼 나약한 게 어디 있나 싶다. 그래도 이 약해빠진 의지 하나 믿고 계속 가야지.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5월 11일 ~ 5월 2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존 파울즈, <만티사>(1982)_[100516]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5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6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7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8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9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10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1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2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3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4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5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16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7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8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20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21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2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3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4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5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6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9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30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1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16일) 존 파울즈는 <만티사>에서 소설을 완벽하게 가지고 논다. 소설을 가지고 노는 수준을 넘어 유머마저 가지고 노는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은근히 야하면서 동시에 노골적으로 외설적인 1장을 불편 없이 보고 나면, 기존의 소설들에서 접하기 어려운 짜릿한 내용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존 파울즈가 소설 속에서 화자에 대해, 작가에 대해,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비판할 수 있었던 건 그가 42년간 써온 일기의 영향 탓이 컸을 것이다.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은 결국 일기(쓰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 소설에서 '대화'는 연극에서의 대화와도 달라야 하고, 일상생활에서의 대화와도 어느 정도의 차별성을 지녀야 한다. 조금 과장해서 말해보면, 처음 접하는 소설을 판별하기 위한 기준으로, 작품 속에서 대화가 어떤 방식으로 표현되었는가만 보아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다. 고수들은 소설에서의 대화가 무엇이며 어떤 기능을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엄청나게 잘 구사한다. 쿳시가 그렇고 또한 존 파울즈가 그렇다. 후반부, 설명과 의미 부여에 너무 공을 들인 것 같다. 맥락상 필요했다는 생각과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겠다는 생각이 함께 한다. <콜렉터>에 이어 다시 한번 씨익, 미소를 짓게 만드는 소설이다. 마지막으로, 여자독자들이 존 파울즈의 소설(이나 일기)를 읽고 어떤 생각(혹은 감정)을 갖게 될지 궁금하다.
+ 신형철이 정호승의 칼럼을 비판한 아름다운 글(http://bit.ly/ccO8ox)을 읽고나니 더욱 신형철의 글이 읽고 싶어져 여기저기 검색하던 중 <씨네21> "김혜리가 만난 사람" 인터뷰에서 한 구절이 새롭게 눈에 띄었다. (출처: http://bit.ly/15iiKM) "소설의 경우 실력이 판가름나는 대목은 대화가 아닌가 싶어요. 전형적인 대화를 갖고 서사를 진행시키려고 들면 긴장감이 저하돼요." 분명 예전에도 본 인터뷰 기사인데 다시 보니 완전히 다르게 보인다.
+ 환절기 증후군에 휩사여 허우적댔던, 길고 긴 열흘이었다. 앞으로 남은 5월, 이제껏 허투루 보낸 시간까지 죄다 끌어모아 알뜰살뜰하게 지냈으면 좋겠다. 뻔한 얘기지만, 한 권의 책보다는 좋아하는 친구와의 대화가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해준다.
2010년 5월 9일 일요일
5월 1일 ~ 5월 10일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5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6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7위. 존 쿳시, <엘리자베스 코스텔로>(2003)_[100505] (2)
8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9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10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1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2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3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4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15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6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7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19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20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1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2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3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4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5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9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30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7일)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는 쿳시가 그간의 작품 속에 내재시켜 온 사유 내지는 문제의식을 총결산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도 흔히 볼 수 있는 장편소설 형식을 완전히 벗어나서. 읽는 거의 내내, 쿳시 매니아를 위한 작품이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 동시에 쿳시의 소설(스타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보면 큰 매력을 못 느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했다. 타당한 예는 아니지만, 나만 해도 처음 이 소설을 볼 땐 지금처럼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땐 고작 <추락> 한 편만 본 상태였다.
이야기가 꾸준히 이어지지 않고 단편적으로 나뉜다는 점에서, 또한 한 인물(작가의 분신이랄 수 있는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이 미세하게 모습(설정)을 바꿔가며 각 단편에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이 소설의 구성 방식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각 단편에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 상황을 코스텔로라는 인물에 투사하고 다시 그것을 극단적인 쪽으로 밀어붙여, 그것에 대응되거나 적대적인 생각이나 관념, 상황과 힘겨루기를 하게"(299p) 한다. 그리하여 문제에 대한 정답을 유예하며 정답의 스펙트럼을 넓히려고 애쓰는데, 이러한 소설 속 "끝장 토론"을 보며 내 사고가 풍부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어떻게 이토록 완벽하게 다른 의견들이 두루 존재할 수 있는지 그저 의아하고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대화의 방식에서 도선생의 작품 스타일이 떠올랐지만, 도선생보다는 쿳시가 훨씬 더 간결하면서도 극단적이고 합리적이며, 주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큰 것 같았다(만 도선생의 작품을 읽다보면 생각이 또 바뀔지도 모르겠다). 쿳시는 정말 대화를 잘 구사하는 작가다.
내 소설 취향에 따르면 이 소설은 별 이의 없이 1위에 랭크되어야 한다. 하지만 고작(?) 7위다. 이 소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 못한 건 전적으로 내 무지 때문이다. 내가 미처 관심을 갖지 못한 부분, 아예 지식이 부족한 부분들이 너무 많아 내용을 이해하는 데 애로사항이 많았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겠다.
+ 주노 디아스의 데뷔작이자 단편집 <드라운>을 읽었(지만 단편집이므로 순위 목록에선 제한)다. 도미니카공화국 출신의 미국 이민자에 대한 자전적 내용 외부에 레이먼드 카버의 향취가 많이 묻어나는 단편들이었다. 그 어떤 작품이라도 작가의 내면이 투영될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게 어떤 고귀하고 진실된 내용일지언정 작가 자신의 자전적(혹은 고백적) 소설에는 크게 끌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다 본 뒤 드문드문 밀려드는 묘한 여운은 어쩔 수 없다.
+ 리스트 1차 목표였던 30위까지는 우선 달성됐다. 별 의미도 없고 감동도 없으나 기왕 시작한 거 100위까지 목록은 작성하고 계속하든지 그만두든지 해야겠다. (독서 속도로 봐서 꽤 오래 걸릴 듯) 블로그를 옮기려 했으나 굳이 그럴 필요까진 못 느껴(=귀찮아서) 우선 리스트만 특화시킨 채 계속 유지할 예정이다. (구글과 통합 이후 이 블로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봐야겠다.) 대신 다른 컨셉의 블로그를 하나 더 만들었다. 블로그와 트위터의 장점을 잘 조합해서 만든 그런 곳이다. 클릭(강요)
2010년 4월 30일 금요일
4월 21일 ~ 4월 3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1980)_[100430] (2) (NEW)
5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6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7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8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9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10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1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2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3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14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5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6위.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1985)_[100424] (1) (NEW)
18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9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20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21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2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4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8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9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미셸 투르니에, <황금 구슬>
(24일) <황금 구슬>은 미셸 투르니에의 작가적 역량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과 비교해서 보면 특히 그렇다. 그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적합한 스타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고 소설을 쓴다. 그런 점에서 투르니에 작품의 번역을 한 명이 전담해서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 역자들마다 즐겨 사용하는 어휘, 표현, 더 나아가 그들이 구사하는 문장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번역자가 다르다는 사실이 이렇게 민감하게 다가온 건 굉장히 오랜만, 아니면 처음인 것 같다. (쿳시를 읽으면서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보다 훨씬 잘 읽힌다는 점만 빼면, 두 소설은 공히 내 취향에 부합하지 않는 소설이었다. (어떻게 하면 소설에 대한
취향을 좀 더 확장시킬 수 있을까?) 이미지를 축으로 하여 다양한 에피소드와 다채로운 이야기들로 버무려놓았지만, 그 속에 심어둔
(현대)철학적 사고관이 너무 빤히 드러나보였다. 그는 (쿤데라 식의) 인간 탐구보다는 철학(의 소설화)에 더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자기 스스로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소설 <마왕>의 모든 이야기는 바로 저 성상이 보여주는 포리의 개념에 외투를 두른 것이라고 볼 수
있소. 내 소설은 모두 그와 같소. 철학적인 개념을 감싸는 이미지의 외투요. 각각의 사물 속에는 한 마리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
/ 알몸으로 나가기를 저어하는 물고기여, 내 그대에게 이미지의 외투를 던져주마ㅡ란자 델 바스토."(390쪽) 이런 점에서 철학이론으로 소설
비평을 하는 문학평론가들이 특히 좋아할 법한 소설일지도 모르겠는 인상이 짙었다. 무엇보다 맘에 들지 않았던 점은, 어찌된 노릇인지
주인공들이 만나는 사람들마다 주인공에게 자신의 과거 넋두리 내지는 에피소드를 털어놓는다는 것. 심지어는 얘기하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사람들처럼 보였다. 실제로 우리들이 그런가?
요
따구로 말하기는 했어도 이 소설에 나오는 민담 혹은 구전적인 이야기는 너무너무 매력적이었다. 특히 붉은 수염 하이레딘의 이야기나,
움 칼숨의 노래 이야기, 금발머리 여왕의 전설 같은 이야기. 책 뒤편에 실려 있는 미셸 투르니에와 이세욱과의 대담을 보니 이런
이야기들은 (다른 데서 차용해서 쓴 게 아니라) 직접 만들어서 썼다고. 이야기 만드는 내공은 숨길 수 없는 듯. 그래서 그의
소설보다는 우화집이 더 땡긴다.
알랭 푸르니에, <대장 몬느>
(29일) 이 소설은 두꺼운 분량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쯤 읽다 그만 덮어버리고 말았다. 난
아무래도 "아련한 감동"이라든지 "아름답게 수놓은
명작"이라든지 "감수성"과 같은 수식이 들어간 소설은 안 맞나보다. (이런 저렴한 취향 같으니라고!) 그러니까 이 소설은 낭만적, 수채화, 감성적과 같은 키워드로 묶을 수 있다. <데미안>, <위대한 개츠비>,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같은 작품도 마찬가지였고. 영화의 도움을 얻은 후 다시 보려 했으나 파일을
찾을 수 없네. 굳이 프랑스 p2p를 뒤져가며 볼 것까진 없을 것 같고. 존 파울즈의 <마법사>를 보고 <대장 몬느>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그런 이유로 우선 존 파울즈가 이 소설을 읽고 쓴 일기 대목을 발췌해둔다. 열린책들에선 소설 제목을 "대장 몬"이라고 표기했다. "<대장 몬>을 처음 읽었다. 크루소처럼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보고, 결국 이 섬에 내가 제일 처음 상륙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상한 체험이었다. <대장 몬>의 모든 행간마다 어른거리는 녹색의 유령은 내가 <마법사>에서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푸르니에의 작품은 수채화풍이고, 내 것은 영화적인 기법이다(물론 나는 책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글을 쓴느 건 아니지만 영화, 특히 환상적이고 낭만적이고 시적인 영화 ㅡ 가령 콕토, 부뉴엘의 <크루소>, 안토니오니, 그 밖의 작품 ㅡ 가 창작에 깊은 영향을 준다). 하지만 노리는 바는 똑같다. 미스터리, 순수한 미스터리를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대장 몬>의 비결은 견실한 농촌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는 점이다. / 그 힘의 비밀은 이런 것이다. 상징적 심리적 진실이 너무 커서, 표면상의 황당한 얘기들이 다 그런대로 넘어간다는 것이다. 소설은 현실보다 훨씬 더 환상적일 수 있고, 그래도 독자들이 믿어주는 것이다. 이것은 내게 용기를 준다. (존 파울즈,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2>, 1021-1022p)
존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30일) 정치소설에는 전혀 관심이 없지만 정치적인 소설은 언제든 볼 준비가 되어 있다. 실은, 소설이라면 윤리적인 측면에서 정치적이어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다. 그리고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그 윤리적인 측면에 충실히 복무하고 있다.
왕은철 교수는 옮긴이의 말에서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그것은 "이 소설을 읽을 때, 가능하면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으라는" 것이다. 나는 가독성이 좋다든지 단숨에 읽어버렸다는 식의 리뷰가 있는 소설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피곤하게) 굳이 활자를 통해 접해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매체를 통해서 봐도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야만인을 기다리며>의 경우 많지 않은 분량(총267쪽)임에도 단번에 읽는 일이 힘든 소설이다. 주인공이 되뇌는 의문을 곱씹어봐야 하고, 이성을 가장한 비이성적인 짓거리들을 보며 발생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나라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에서 30년 전쯤에 쓰인 소설을 보며 자꾸만 오늘의 한국이 환기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이곳 사람들에게, 마지막 남은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그저 광대이고 미친놈일 뿐이야. 당신은 지저분하고 악취 나는 인간이야. 1마일쯤 떨어진 곳에서도 네 놈의 냄새가 날 정도야. 당신은 늙은 거지같이 생겼어. 쓰레기를 주워 먹고사는 거지 말이야. 그들은 당신이 어떤 식으로든 돌아오는 걸 원치 않아. 당신에겐 미래가 없어."(194쪽)
소설 속 화자와 그의 발언 속 '당신'이라는 인물이 현재 한국의 특정 인물을 환기시킨다는 건 끔찍한 일이다. 비록 발췌는 위의 구절 하나밖에 하지 않았지만 이런 부분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벌어지는,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 일들이 소설의 내용과 함께 가독성을 떨어뜨리는 주요 요소다. (가독성과 작품성에 도대체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건가?) 그러므로 이 소설은 단순히 식민주의나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형상화 이상의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작년 초에 보고 1년 몇 개월 만에 다시 보는 쿳시의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여전히 나를 (역자인 왕은철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불편하게 만들고, 사념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만들었다. 나는 언제든 내 변덕스러운 이성을 얼얼하게 만들고 편협한 가치관을 뒤흔들어주는 작품에 빠져들 준비가 되어 있고, 쿳시의 소설이 정확하게 그러한 역할을 한다.
폴더 안에 폴더를 하나 덧붙인다. 아래 폴더엔 작년 초에 <야만을 기다리며>를 보고 쓴 내용이 있다. 소설은 독서 당시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그때그때 다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아마 그것이 좋은 소설의 특징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비록 정교한 리뷰가 아닐지라도, 그냥 생각나는 것들만 주욱 나열하는 식의 감상일 뿐이라도, 기록해두는 것은 현재를 위해서도 나중을 위해서도 중요한 일이다.
작년꺼 열기
다음은 <야만을 기다리며>의 말미(273-274쪽)에 있는 "옮긴이의 말"의 일부다.
ㅡ 그렇다면 왜, 치안판사(*소설 주인공)나 쿳시(*작가)는 그들에게 득이 될 것이 없는 질문을 하고 거기에 대한 답을 찾으려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을 쿳시 자신의 말로 옮겨보면 이렇다. "사람은 왜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물질적 이익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편에 서려고 하는가?" "나는 왜 진실이 내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데 내 자신에 대한 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전자는 죨 대령(*치안판사와 대립하는 인물)의 편에 서서 자신이 늘 해온 직무를 수행하면 여생을 편히 살 텐데, 그걸 마다하고 온갖 고초를 자진해서 겪은 후 자기고백적인, 아니 자기고백적이어서 자신에게 더욱 득이 될 것이 없는 얘기를 하는 치안판사를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고, 후자는 톨스토이, 루소, 도스또엡스키에 관한 에세이에서, 자신에게 득이 될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고백에 관한 문제를 반추하고 또 반추하는 자신을 향해 쿳시가 던지는 질문이다. 그에 따르면, 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정의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고, 후자에 대한 답은 "우리가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나기 때문"이다. 두 질문에 대한 쿳시의 '플라토닉한' 답변은 왜, 쿳시의 소설의 주인공들이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파고들면서 때로는 자멸에 가까운 고백을 하는지, 그리고 왜, 쿳시가 그러한 내러티브에 매달리면서 자신의 고뇌를 투영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정의나 진실에 대한 개념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쿳시의 말은 궁극적으로 글쓰기가 윤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잘 말해준다.
부커상 수상작인 <추락>을 심사했던 보이드 톤킨(Boyd Tonkin)은 <추락>에 대해 "아이스 피켈(ice-axe)로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었다"라고 표현했다. 과연, 나는 아이스 피켈이 어디에 쓰이는 물건인지도 몰랐으나 <추락>을 읽고나서 그 느낌이 어떤 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느낌만 가지고 비교해 봤을 때, <야만인을 기다리며>는 조금 그 세기가 약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초반부만 해도 대단히 유사한 느낌이었으나 중반으로 갈수록 그 느낌은 확실히 줄어들었다. 하지만 그 틈을 타고 대단히 오묘한 느낌이 발생했으니 그것은 유머였다. 하지만 단순히 유머라고 표현해버리면 내 느낌이 왜곡되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풍자나 아이러니나 조소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정색과 광기가 공존하는 유머랄까. 다음은 그것이 절정을 발하는 부분이다.
ㅡ 이번에는 다음 것에 무슨 말이 쓰여 있는지 봅시다. 아, 단어 하나만이 달랑 쓰여 있구먼, 야만인들의 말로 전쟁이 라는 말이오. 그런데 이 단어에는 다른 의미들도 있소. 그건 복수를 의미하기도 하고, 이렇게 위아래를 뒤집어 읽으면 정의라 는 말이 되기도 하오. 어느 것을 의미했는지 알 길은 없소. 그게 야만인들이 교활한 이유요. 그건 다른 나뭇조각들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말이오. (190쪽)
소설 맥락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사실 이런 발췌 구절은 아무런 힘이 없다. 이 부분이 어떻게 절정이 될 수 있는지는 소설을 읽어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많지 않은 분량의 소설임에도 읽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 글의 초반에 발췌한, 소설에서 보여지는 '윤리(혹은 진실이나 정의)'가 어둠 속에 갇혀 있는 우리네 심연을 밝혀주기 (밝혀보려 애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평론가 신형철은 <몰락의 에티카>에서 자신만의 에티카(윤리학)를 말하며 문학이 종언하지 않았음을(종언할 수 없음을) 말하고자 하지만, 실은 윤리라는 것은 몰락했건 아니건 우리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어떤 소설이 문학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잠시 망각했거나 자연스럽게 모른 척했던 어떤 '윤리(윤리 시간에 배우는 윤리 말고)'를, 고스라니 드러내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스스로에게 한 번쯤 해봄직한 질문.
ㅡ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단순히 교양이나 오락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동안 겪을 수 있는 경험은 한정되어 있고, 더군다나 극한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일은 더욱 드물 것이다. 소설은 그러한 우리의 인생에 예고 없이 침입하는 일종의 이물(異物)이다. 그것을 그냥 배제해버리고 말 것인지 아니면 잘 다듬어서 진짜와 같은 하나의 경험으로 만들 것인지는 독자의 태도 여하에 달려 있다. (히라노 게이치로, <책을 읽는 방법> 中)
내가 만약 치안판사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처럼 말하고 행동할 수 있었을까. 내 성정에, 그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심정으로 살아가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새삼, "한 나라가 위대한 작가를 갖는다는 것은 또 하나의 정부를 갖는 것과 같다"는 러시아 작가 솔제니찐의 말이 와 닿는다. 우리나라엔 언제쯤 위대한 작가가 탄생할까. //
+ 겐이치로 형님이 짱이네 멋지네, 라는 소리를 이번 주에만 몇 번 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은 아쉽게도 하위권에 랭크. 그의 소설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안타까운 마음을 금치 못하... 트위터에서 @gombimbee 님과 겐이치로 형님에 대한 얘기를 하던 중, 내가 그의 작품을 읽으면 디스크 조각모음 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하자 그가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 "뭔가, 잘게 오려진 무수히 많은 색종이가 공중에 떠다니는 느낌? ㅎ 색깔은 모두 비비드하고, 결국엔 모두 한곳으로 빨려 들어가고요. <야구>도, "골때리는" 색종이들이 막 떠다니다가 한곳에 안착하더라고요." 너무 마음에 드는 표현이라 그만 사랑한다고 고백할 뻔했... ( -_-);
2010년 4월 19일 월요일
4월 11일 ~ 4월 2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5위. 존 파울즈, <콜렉터>(1963)_[100413] (2) (NEW)
6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7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8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9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10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1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2위.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1967)_[100419] (1) (NEW)
13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4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15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6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7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18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19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20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21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2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4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6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7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너무 길어져서 접어둔다.
존 파울즈, <콜렉터>
(14일) 대략 3,4년 전에 처음 본 존 파울즈의 <콜레터>를 다시 읽으며, 최소한 2008년 이전에 본
소설이라면 전부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이렇게 다르게 다가올 수가 있지? 물론 존 파울즈의 일기(<나의 마지막
장편소설>)를 보고 난 뒤라 그의 소설 세계가 좀 더 친숙해졌다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소설 초반부엔 일기에서 봐 왔던
작가의 글쓰기 습성이 아른거리는 듯해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싶었으나 그런 생각은 곧 사라진다. 최소한의 몇 가지 점만
제외하면, 그는 확실히 화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그건 미란다가 화자로 나오는 2부를 읽어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나는
<컬렉터>에서 미란다의 배경을 가진 여자의 생각과 언어를 너무 정확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반면, 대부분의 심지어 <사실적인> 작가들도 독자를 속이고 있다. 그들(사실적 작가들)은 등장인물들을
통하여 아무런 가면도 쓰지 않은 채 자기(작가) 자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1021쪽)) 더불어 (존 파울즈와 여자에 대해 갖고 있는 내 지우기 힘든 고정관념 내지는 편견에 의하면) 여자 독자가 존
파울즈의 작품을 좋아하기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특수한 상황을 설정해 그 속에 인간을 집어 넣어 소설을 썼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와 유사하지만,
단순히 이야기적 재미(혹은 상상력)가 아니라 추상적이지만 확고한 상징(적 의도 및 목적)을 가졌다는 점이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컬렉터(수집가)는 현 사회의 평범함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현 사회는 사로잡혀 있다. 그 사회의 희망과 진실한 생명력은 악의에
걸려서 무의미하게 망가졌다.", "작품의 의도가 상징적이라는 것을 아무리 여러 번 설명해도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플라토기한 것,
납과 황금의 대조. 물론, 오늘날의 모든 사람들처럼 그녀는 납의 영혼을 가진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있다. 형이상학적으로 그들은
동정을 살 만하다. 그들 자신이 납의 영혼을 가지겠다고 선택한 것은 아니다. <사물의 불공평(황금과 납의 영혼)은 절대적으로
질 높은 개인적 행운을 요구한다> 대 <진보는 황금의 영혼에게 달려 있다>라는 명제가 맞붙었다. 하지만 문명은 이
시합의 심판으로 나선다. 내가 즐겨 쓰는 용어로 풀이해 보면, 미란다는 아리스토스(좋은 사람)이고 클레그는 폴로이(나쁜
사람)이다. 폴로이는 주제넘게 아리스토스를 살리려고 애쓰지 않아서, 그들(좋은 사람)을 물속에 빠트려 질식시켜 버린다." (각각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795쪽, 806쪽)) 무엇보다 시간의 흐름과 심리의 흐름이 너무 잘 맞아떨어진다. 다음에 볼
땐 책이 편집된 순서대로가 아니라 1부와 2부를 번갈아가며 사건과 주인공들의 심리의 흐름에 맞춰 봐야겠다. 그방법이 더 재미있을
것도 같다.
'밀실 감금'과 '서스펜스'라는 측면에서 스티븐 킹의 <미저리>가
떠올랐다. 물론 두 소설에는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특히 가둔 자와 갇힌 자의 성별이 다름으로써 나타나는 효과에 주목해서 보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 같다(만, 스티븐 킹의 소설은 또 언제 본다냐. 쩝)
1부는
가둔 자의 시점으로 전개되고 2부는 갇힌 자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1부와 2부를 써나갈 때, 존 파울즈가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조직하고 구성했을지 너무 궁금하다.) 3부와 4부는 (다시 가둔 자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결말인데, 4부는 모파상의
"목걸이"처럼 한 번 더 치고 나간 결말인 동시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서 나타난 소위 '포스트모던'적 결말을
배태하고 있는 결말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 읽는 내내 소설의 제목이 왜 "컬렉터"인지 궁금했는데 결말을 보고 나니
제목을 납득할 수 있었다. 왠지 모르겠으나(사실 알고 있지만 굳이 적어두진 않겠다), 소설을 다 읽은 후 씨익, 미소를 짓게
되었다 .
PS.
1. 누가 제인 오스틴 빠돌이 아니랄까봐 나원참.
2. 존 파울즈가 '엄마'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한 건 어떤 작품에서부터일까. 아니, 그는 과연 '엄마'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을까?
미셸 투르니에,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19일)
철학이 없는 소설은 매력이 없지만 철학이 너무 돋우보이는 소설은 소설적 재미가 부족하다. 미셸 투르니에는 철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애초에 철학과 소설의 바람직한 결합에 있었다. "가짜 소설이요 가짜 철학인 이른바 '철학적 소설' - 볼테르 류의 - 이 아니라 참다운 철학과 참다운 소설 - 헤겔 같은 철학과 에밀 졸라 같은 소설 - 사이에 통로를 놓아보자는 것이다."(328p) 내 취향이 아닌 건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글쓰기 스타일에 가장 적합한 이야기를 발견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잘 만들어냈다는 건 분명하다.
화려하고 수식이 가득한 문장보다는 기름기 없이 담백하고 정확한 문장을 사용하고, 이야기의 서사성보다는 앞서의 문장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신비롭고 매혹적인 장면들이 모여 전개되는 소설이다. (각각의 소설에 걸맞는 독서법이란 게 따로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이유로 이 소설은 충분히 느리게, 이를테면 Adagio의 느낌으로 봐야 한다. 비록 쉬이 읽히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부분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으니까. 특히 중반 이후 방드르디가 출현하면서, 그리고 그가 사고를 치면서(?) 그 매력은 절정을 발한다. 다만 분량이 좀 더 길지 않은 점이 못내 아쉽다. 그랬다면 로빈슨 크루소의 변화에 좀 더 리얼하게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18세기에 행위하는 활동적 로빈슨크루소가 20세기에 와서 사고하는 철학적 로빈슨크루소로 변모하는데, 이 사실이 <로빈슨 크루소>와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에 등장하는 로빈슨 크루소의 표면적이자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18세기 소설과 20세기 소설 속 인물들의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인물의 특성도, 이야기 전개에서도 두 소설 사이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점이 존재하지만 <로빈슨 크루소>를 이 소설의 주석으로 활용하여 봐도 꽤 재미있을 듯하다. 물론 방드르디(프라이데이 or 금요일이)의 출연의 이후 이야기 전개는 <로빈슨 크루소>와 완전히 다르지만.
책 뒤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작가 의도가 나와 있다. "나는 자신의 의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로빈슨 스스로가 깨닫게 되는 소설, 그것이 터무니없는 짓이라는 느낌 때문에 그의 건설 사업이, 이를테면 내부로부터 잠식되어 붕괴해 버리는 그런 소설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드디어는 방드르디가 불쑥 나타나서 모든 것을 완전히 무너뜨려 버리는 그런 소설을 말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작가 자신이 말하는 작품의 주제. "내가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발전 단계에 있어서 두 가지 문명의 만남이라기보다는 비인간적인 고독으로 인하여 한 인간의 존재와 삶이 마모되고 바탕에서부터 발가벗겨짐으로써 그가 지녔던 일체의 문명적 요소가 깎여나가는 과정과 그 근원적 싹쓸이 위에서 창조되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그렸다.(*비문인듯)"(376p)
좋은 의도이고 의식적인 주제라는 건 알겠으나 그 사실이 너무 명명백백하여 되려 읽고 나서 찾아오는 감흥이 덜하다. 의문을 던지지도 않고, 어떤 새로운 진리를 보여주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의도에 맞는 이야기를 쓰기 위해 작가는 방드르디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말하고 행동하도록 그리는데, 그건 결국 지배자 백인이 갖고 있는 흑인(내지는 유색인종)들에 대한 편견(혹은 상식)을 변형된 형태로 드러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20세기의 투르니에나 18세기의 디포나 크게 다를 바 없다는 얘기다.) 작가가 아무리 방드르디가 소설의 핵심인물이라고 말해봤자, 심지어 책 제목에서마저 '방드르디'를 쓰긴 했지만, 소설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여 변화+발전하는 인물은 로빈슨 크루소다. 아무리 묘사를 잘 했더라도 방드르디는 로빈슨 크루소를 변화하게 만드는 도구로밖에 이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약간은 닭살마저 돋는 그 결말은, 그의 진정한 애정이 방드르디가 아니라 로빈슨크루소에게 가 닿아 있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잘못 이해했을지도 모르니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리고 다시 볼 땐 소설 속 단어와 문장들을 수집한다는 생각을 갖고 읽어야겠다. (김화영 선생의 번역은 아니나 다를까 명불허전이다!) 무엇보다 고유명사의 활용방식이 너무 훌륭하다. 그런 사용이 소설의 개성적인 스타일을 한껏 살려주고 있다. 몇 문장만 읽어도 이 작가의 내공을 체감할 수 있는 정도로.
PS
1. 파울즈가 이 소설을 읽었을까? 읽었다면 뭐라고 했을까. 그의 감상이 궁금하다. 열린책들에서 존 파울즈의 두 번째 일기를 출간할 계획이 현재로선 전혀 없다고 하여 부득불 원서를 주문하긴 했는데, 감상이 있었으면 좋겠네.
2. '칠레'라는 국명이 자주 언급되는데, 볼라뇨 덕분에 그 이름이 조금은 각별하게 다가온다. 이를테면 이것이 작가의 힘이 아닌가 싶다.
2010년 4월 13일 화요일
당신이 진정한 예술가라면
1. 당신이 진정한 예술가라면 당신의 존재 전체를 예술에 쏟아넣어라. 조금이라도 부족하게 되면 당신은 예술가가 아니다. G.P.는 그런 예술가를 <창조자>가 아니라고 불렀다.
2. 감정을 분출해서는 안 된다. 하찮은 고정관념 등을 사람들 앞에서 쏟아놓지 말라.
3. 정치적으로는 좌익이 되어야 한다. 그들의 실수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들이야말로 이 세계를 염려하는 유일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다.
4. 항상 창조해야 한다. 자신이 믿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 실천에 관한 말만 지껄이는 것은 그리지도 않은 그림을 자랑하는 것과 같다. 가장 나쁜 태도이다.
5. 무언가를 깊이 느꼈을 때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면 안 된다.
6. 자신이 영국인이란 사실을 받아들여라. 프랑스인이나 이탈리아인의 흉내를 내지 말아라.
7. 그러나 자신의 출신배경과 타협하지 말아라. 당신의 창조작업을 방해하는 과거의 모든 것을 잘라버려야 한다. 당신이 시골 출신이라면 (우리 부모가 시골 사람들을 비웃는 것은 그들의 출신을 속이려는 눈가림에 불과하다.) 시골의 모든 것을 버려라.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면 당신 속에 있는 노동자 계급적인 요소를 마비시켜 버려야 한다. 다른 계급 출신인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계급이란 유치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이다.
8. 애국심을 내세운 정치적인 일들을 혐오해야 한다. 정치와 예술과 그밖의 모든 것에서 순수하고 심오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전부 혐오해야 된다. 어리석고 하찮은 것에 시간을 낭비하면 안 된다.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 보고 싶다 하더라도 시시한 영화를 보면 안 되고, 저급한 신문을 읽어서도 안 되며,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쓰레기 같은 프로그램을 듣거나 보지 말아야 한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당신의 삶을 잘 활용해야 한다.
ㅡ 존 파울즈, <콜렉터>, 183-184쪽, 장말희 옮김, 영웅출판
2010년 4월 9일 금요일
4월 1일 ~ 4월 1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5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6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7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8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9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0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1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2위.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1719)_[100408] (2) (NEW)
13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4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5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16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17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8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9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20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1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2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4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5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9일) 소설을 번역한 윤혜준 교수의 말처럼, 디포는 "호흡이 길면서도 갑갑하지 않고, 사실을 정확히 전달하면서도 단순화시키지 않는"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였다. (번역하느라 수고 많았을 것 같다.) 초반에는 그 문체 때문에 읽는 맛이 나고 중반부엔 허구를 사실로 만들고자 분투하는 디포의 수많은 디테일들을 보며 읽는 맛이 나며 후반부는 스토리가 읽을 만하(지만 조금 지루한 면도 없지 않)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가장 리얼리티가 떨어졌던 부분은 시간의 흐름과 심리의 흐름이 불일치하다는 점이었다. 디포는 로빈슨 크루소를 굳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섬에 가두어 놓았던 것일까. 28년을 무인도에 살면서 그가 했던 고민과 생각들이 고작 그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은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다. <로빈슨 크루소>는 정말 단순한 하나의 아이디어, 그러니까 "만약 '내'가 무인도에 홀로 남게 된다면"이라는 가정에서 시작되는 소설이다. 그리고 그 사소하지만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끝까지 밀어부쳐 소설로 만들어냈다는 점은 높이 살 만하(지만, 학술적인 가치를 제외하자면 아쉽게도 그게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 소설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마치 가공되지 않은 원석처럼 이 소설의 덜 다듬어진 부분이 아쉬워서, 현대의 작가들이 이 작품을 패러디하는 게 아닌가 싶다. 보통은 주요인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막상 소설 후반부가 돼서야 등장하는 '프라이데이'를 을유문화사판에서는 '금요일이'라고 번역했고 그를 지칭하는 인칭대명사를 '걔'로 통일시켰다. 읽는 도중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명확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얀 마텔은 분명 <파이 이야기>를 쓰며 여러 각도에서 <로빈슨 크루소>를 의식했을 것이다.
+ 나에게 고전이란, 그닥 내 취향도 아니고 썩 재미도 없지만 쉽사리 팔아 넘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책...인가?
잡담
1. 어제 밤새 인터넷을 하면서 우연히 척 팔라닉의 트윗을 알게 되었는데(당연히 팔로했고(*인터넷으로 트윗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뒤늦게 안 사실인데, 내가 팔로한 누군가의 RT였다)), 오늘 낮에 깨어서 보니 내 타임라인에 그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을 언급하며 이 책의 리뷰를 링크시켜둔 트윗이 올라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아메리카의 나치문학>은 우리나라에도 번역본이 있고, 나 역시 얼마 전에 본 작품인데, 이 소설의 재미를 온전히 만끽하기 위해선 중남미 문학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할 것 같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가들이 백과사전적 소설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는 무었일까. 플로베르나, 허먼 멜빌이나, 줄리언 반즈나, 로베르토 볼라뇨나... 또 누가 있지?) 척 팔라닉의 작품이라고는 <파이트 클럽>만 한 번 본게 전부인데, (물론 소설을 영화화한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때문에 소설의 존재를 알았지만. 영화는 세 번쯤 본 것 같다.) 어쩐지 다시 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언제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이건 이를테면 존 쿳시를 좋아하는 강영숙의 작품을 읽어보고 싶은 마음과 유사하다. 하하. (오로지 소설의 구조적인 면만 봤을 때, 나에겐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과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이 짝패처럼 여겨진다.)
2. 예전에 이런 소문이 있었지. 패션잡지 <맥심>의 편집장으로 신해철이 낙점됐다고. 거기에 신해철이 딱히 부연 언급을 안 해 그저 소문에 그친 줄만 알았는데 소문이 진짜였나보다. 게다가 내가 챙겨보는 허지웅도 그 잡지에서 에디터로 일하게 된 것 같다. 새로운 <맥심>은 5월호부터. 2주쯤 후면 서점에서 볼 수 있겠다. 이로써 4월이 끝나기 전에 봐야 할 잡지가 <르디플> 4월호(3월호를 아직 덜 봐서 구입 못한 상태), <1/n>(오늘 도착할 예정)에 <맥심>까지 하나 더 늘었다. 전격 취소!
3. <로빈슨 크루소> 후반부에 보면 선장을 배반한 선원들 얘기가 나오는데 (결국 로빈슨 크루소는 배방당한 선장을 도와 그 미지의 섬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되고) 이 '선장을 배반한 선원들 얘기'가 여엉 낯이 설지 않다. 배나 바다와 관련된 작품에서라면 어디서나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라고는 하지만 딱 꼬집어 어딘가에서 예전에 접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작품이었을까...?
4. 베짱이세실님의 트윗에서 최근에 이충걸이 "낭독의 발견"에 출연했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간만에 밤새는 김에) 찾아봤다. 덩달아 작년 8월경에 이충걸 단독으로 출연한 "낭독의 발견"도 보았다. (중반부부터 장석주도 출연한다.) 아, 세상에 그토록 뽀얀 피부와 미성의 목소리와 소년스러운 장난기를 가지고 있는 40대 중반의 남자라니. (대략 3,4년쯤 전에 장승욱 쌤의 <술통> 출간 기념회 술자리에서 이충걸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멀찌감치에 앉았기에 직접 대화를 주고받지는 못했지만. 그때는 야구 점퍼와 캡을 쓰고 청바지를 입었던 것 같다.) 더군다나 구어에서조차 꼼꼼하게 단어를 선정하고, 그렇게 선정한 단어와 단어를 직조하는 데마저도 세심한 정성을 들이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주절대기 위해 만든 블로그라고는 하지만) 이토록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는 내 스스로를 반성하게 되었... 그의 이름으로 출간된 책 4권은 전부 부산에 있는데 (내 계획이 차질없이 진행된다면) 아마 올 가을이나 겨울쯤에 그의 책을 다시 볼 일이 있을 것 같다.
5. 꿈에 한 30대 중후반쯤 되는 남자가 나왔다. 아버지와 아는 사이 같았는데 나로선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냥 곁에 있다가 별 생각없이 그에게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나는 정말 나이가 지긋하거나 '선생님'이란 호칭에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사람 외에는 '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는 데 거부감이 있는데 이상한 일이다.) 헌데 그 남자는 자신을 왜 (친근하게 형이라 부르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지 의아해하면서 조금 멋쩍어했다. 아버지께 물어보니 내가 어렸을 때 아는 사이였다면서 그분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나중에 집에 전화해서 이런 분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물어봐야겠다. 어차피 꿈이었다고는 하지만, 꿈에서 깨어서도 그 사람의 이름이 또렷하게 남아 있는 걸 보니 뭔가 의미심장... (괜한 의미 부여)
2010년 4월 2일 금요일
존 파울즈가 언급한 작가 혹은 작품
존 파울즈의 일기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에는 많은 수의 작가와 작품들이 언급되는데,
그중에 그가 좋게 본 작품들(작가들)에 대해서 나중에 찾아보기 쉽게 코멘트를 간략하게 정리해둔다.
52쪽 / 도스토옙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 아주 침착한 객관성. 아주 차가운 시선. 희생당한 자. 그 단조로운 회색의 분위기가 아주 뛰어난 저널리스트의 정신으로 밝혀져 있다.
53쪽 / 헤로도토스를 읽고 위로를 얻다. 다른 시대, 다른 풍습, 강력한 상상력의 발휘. 미래가 엄청난 모습으로 다가올 듯한 느낌. / 108쪽 / 헤로도토스. 6개월 만에 독파하다. 아주, 아주 재미있었다.
61쪽 / 스콧 피츠 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깊은 감명을 받다. 지금까지 오랫동안 읽어 온 소설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올더스 헉슬리나 에벌린 워보다 훨씬 훌륭하다. / 639쪽 / 우리는 라디오로 <위대한 개츠비>를 들었다. 여전히 완벽한 작품. / 746쪽 / 스콧 피츠제럴드의 장편소설 <미인과 저주받은 사람>. 피츠제럴드의 소설은 점점 나아지는 것 같다. 아주 비극적인 비전이고, 금세기의 가장 슬프고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다. 암에 걸린 작가가 암에 대한 글을 쓰는 것. 하지만 그 작가는 자신이 암에 걸린 사실을 모르고 있다.
76쪽 / 프랑수아 비용. 그처럼 문학의 숲에서 독보적인 존재도 없을 것이다!
90쪽 /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을 읽다. 챈들러의 소설은 세련되었고, 독창적이며, 아슬아슬하다.
97쪽 /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너무나 위대하고 거대하고 신화적이어서 비평의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다.
187쪽 / T.S. 엘리엇. 그의 견해를 반박한다는 것은 짜증이 날 정도로 불가능하다. 그는 모든 창작의 시금석이다.
331쪽 / 모파상, <미스 해리엇>. 모파상을 읽으면서 무기력의 파도가 나를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리얼리즘이라는 까다로운 테크닉을 모파상처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작가는 없다. / 487쪽 / 모파상. 나는 아직도 그의 작품을 읽으면 변함없는 즐거움을 느낀다. 왜 다른 작가들보다 모파상을 더 오래 읽게 될까? 무엇보다도 그의 소설은 내용이 풍부하고 범위가 넓다.
619쪽 / D.H. 로렌스의 <하얀 공작>. 그의 글쓰기는 때때로 학생의 글처럼 순진해 보인다. 물론 더러 뛰어난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거기에 기적이 있다. 글쓰기가 순진할 때조차 인물들은 살아 움직인다.
619쪽 / 지드, <테제>. 위대한 소설이다. 지드는 유일한 테세우스다. 거칠고, 우상파괴적이고, 사고하는 사람. / 651쪽 / <배덕자>를 읽다. 걸작이다. 지드는 아주 미묘한 사항을 아주 간단하게 말하고 있다.
660쪽 / 제인 오스틴. 남자들은 그녀의 세계로 접근해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은 유리의 저편에서 여자들과 뚝 떨어진 채 헤엄을 치고 있다. 모든 여자는 유리 종 안에 들어 있고 남자들은 그 밖에 있다. / 704쪽 / <에마>. 이 얼마나 신비스러운 작품인가. 최근에 이렇게 많은 기쁨을 준 소설을 만난 적이 없다. / 709쪽 / <설득>. 이 책의 큰 매력은 해군인 등장인물들과, 제인 오스틴의 도덕 체계가 멋지게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 710쪽 / 디킨스가 나쁜 <사람들>의 묘사에 뛰어나다면, 제인은 미덕의 묘사에 뛰어나다. / 723쪽 / 제인 오스틴의 <노생거 사원>. 악의를 다룬 아주 재미있는 작품. 하지만 중심적 주제에서 약간 벗어난 소설이다. / <오만과 편견>. 모든 작품 중에서 성적 긴장이 가장 높은 소설. 그런 긴장은 오스틴 소설의 비밀이다. 모든 것에서 성애의 광휘가 빛난다. 전희를 아주 세밀하게 다루고 있다. / 725쪽 / 제인 오스틴의 <샌디턴>. 오스틴의 작품들 중에서 이것이 가장 유망하다고 생각된다. / 766쪽 / 디킨스와 새커리의 모든 작품들은 제인 오스틴에 비해 보면, 뽐내는 원숭이와 마카로니 웨스턴에 지나지 않는다.
677쪽 / 디킨스. 그가 묘사하는 세계의 풍성함. 그것은 잘 구워 놓은 거위와 같다. / 683쪽 / 찰스 디킨스의 <어려운 시절>. 나는 이 경건하고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책을 읽었다. / 758쪽 / 찰스 디킨스의 장편소설 <위대한 유산>의 제 29장. 이것은 진정으로 뭔가 심오하고 거대한 것을 포착한 획기적인 챕터들 중 하나다. 하나의 원형을 이루는 챕터다.
686쪽 / <베어울프>. 신선한 경험. 단순하고, 빠르고, 난폭하고, 완벽하다. 온 사회가 완벽하게 요약되어 있다. 시는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697쪽 / 커즌의 <수도원들>. 영어로 발표된 최고의 여행서 6권 중 하나. 그 여섯 권 중에서도 가장 매력적이다. 이 책은 좋은 여행서의 필수 규칙을 따르고 있다. 여행이 아니라 여행자를 다루고 있는 것이다.
724쪽 /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은 부메랑이다. 사람들이 셰익스피어는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돌아오는 것이다.
733쪽 / 마크 트웨인의 <해외 도보 여행>. 트웨인은 위대한 원천이다.
738쪽 /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위대한 소설이다. 등장인물은 곧 죽어 없어질 운명이지만 그래도 위대하다. 그것은 작가가 삶의 본질을 제대로 짚었다는 뜻이다. 삶의 본질에 도달했다면, 그 작가의 방법은 성공한 것이다. 그게 어떤 방법이든 문제되지 않는다. 가령 조이스, 울프, 카프카 등을 한번 보라. 금세기의 문학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비극적인 연애 사건들보다 훨씬 더 리얼하다. 어쩌면 <위대한 개츠비>의 러브스토리가 이에 근접할 것이다.
739쪽 / 스탕달의 <파르마의 수도원>. 여기저기에서 잠깐 글 읽기를 멈추고 왜 이 책이 위대한지 생각해 보았다. 볼테르와 라신은 스탕달의 실질적인 부모다. 한쪽(볼테르)의 아이러니와 지독한 이기주의, 또 다른 쪽(라신)의 웅장함과 형식성. 가장 낭만적인 순간에도 스탕달은 묘사하고 관찰한다.
742쪽 / 그레이엄 그린의 <추악한 미국인>. 그린의 글쓰기가 초라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시적인 분위기의 글쓰기뿐이다. 버지니아 울프나 제임스 조이스 같은 작가들은 그린과는 반대편에 서 있는 산문 시인들이다. 디포 ㅡ 윌키 콜린스 ㅡ 그린 / 839쪽 / <불타버린 케이스>. 물론 그린의 다른 소설들처럼 술술 읽힌다. 앞으로 백 년 후인 2061년의 비평가들은 그런 가독성을 별로 높이 쳐주지 않을 것이다. 그린의 소설은 전체적으로 너무 짧고, 피상적으로 보인다. 물론 그린의 소설은 대부분의 현대 소설들보다 열 배는 더 훌륭하다. 하지만 조지프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의 수준이 비하면 실패작이다. <불타버린 케이스>는 스케치이지 소설이 아니다.
745쪽 / 나는 최근에 예이츠의 시를 많이 읽었다. 그 눈부신, 늘 뜻밖의 명쾌한 리듬이 목소리.
751쪽 / 에밀리 브론티의 <폭풍의 언덕>. 이 소설을 다시 읽고 그 매력에 거듭 빠져 들었다. 이 소설은 왜 대여섯 개의 위대한 영어 소설들 중의 하나인가? / 775쪽 / 낭만파에게는 위대한 소설이 없다. 사실, 낭만파의 가장 위대한 소설은 에밀리 브론티의 것이 유일한데, 그것은 디킨스와 기타 작가들이 <분위기> 창작이 발견된 뒤에 집필된 것이었다. 요컨대, 기술은 감정을 표현하기 위하여 개발되어 왔든 것이다.
763쪽 /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를 읽었다. 대단히 아름답고 아득히 심오하기 때문에 눈물이 절로 흐른다. 그가 단 한 줄의 시행에 채워 넣는 그 많은 의미들이란!
774쪽 /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 엉성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고전이 된 소설. 상징적인 진실, 두드러진 힘, 원형이 되는 아이디어. 심지어 소설 중의 사소한 인물도 상징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775쪽 / 귀스타브 플로베르의 <감정 교육>. 가장 위대한 소설들 중의 하나. 디킨스와 새커리는 이런 수준의 작품에 견주면 얼마나 값싼가!
776쪽 /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뛰어난 장편소설. 만약 엘리엇이 제인 오스틴보다 더 위대한 작가라면(물론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지만), 엘리엇의 아이러니가 훨씬 더 복잡하기 때문이리라. / 778쪽 / <미들마치>. 지금보다 4분의 1 정도를 줄인다면, 훨씬 더 위대해질 수 있는 소설.
803쪽 / 몽테뉴를 다시 읽다. 만약 대학살에서 책 한 권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셰익스피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그다음 책은 몽테뉴라고 본다. / 825쪽 / 몽테뉴는 나를 부끄럽게 만든다. 지난 몇 년 동안 열심히 이 일기를 써왔지만 나는 몽테뉴에 미치지 못한다. 솔직함이 부족하고, 자기 진실이 부족하고, 몽테뉴적 의미로 "남에게 동의하는 태도"가 부족하다.
805쪽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월든>은 <유토피아>나 <캉디드> 수준의 작품이라는 뜻이다. 몽테뉴의 글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소로의 글이 곧 나의 글이라는 느낌이 든다. 마음속에 담아 두고 말하지 않는 것을 대신 말해 주고 있다.
883쪽 / "위대한 정의란 결국 잊어버리는 것이다." 셀린의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 / 893쪽 / 셀린의 소설, <밤의 끝으로의 여행>. 주목할 만한 책. 나는 이 책을 말로의 <인간의 조건>과 카뮈의 <페스트>와 같은 수준이라고 본다. 잃어버린 세대부터 비트족의 작가들에 이르는 미국 문학의 전통도 이 책이 빚지고 있다. 사르트르의 소설들도 셀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 그 예리하면서도 신랄한 무능함의 감각. 그것은 내게 <캉디드>를 연상시킨다.
898쪽 /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 이것은 1922년 이래 영국의 예술 분야에서 나온 가장 위대한 작품이다(<황무지>, <율리시스>와 동급이다).
907쪽 / 결국 나는 영국 문학보다 프랑스 문학을 더 잘 알고 있고, 내가 가장 존경하는 거의 모든 소설가들은 과거든 현대든 프랑스 사람입니다(비록 제인 오스틴이 나의 명단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지만). 나는 영국의 어떤 작가들보다 지드, 카뮈, 심지어 라클로 같은 작가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느낍니다.
981쪽 / 허드슨, <녹색의 장원>(1904). <녹색의 장원>은 <로빈슨 크루소> 못지않게 영국적이다. 좋은 작품이다.
991쪽 / 상황이 극단적이고 환상적일수록, 묘사와 대화는 더 현실적(카메라-눈)이고 진지해야 한다. 사례. <로빈슨 크루소>와 <정오의 어둠>. 추론. 상황이 평범할수록, 언어와 대화는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 사례. <율리시스>와 <댈러웨이 부인>.
1014쪽 / 머독의 <절단된 머리>. 나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헐뜯지만, 이것은 정말로 재미있는 책이다.
1021쪽 / (* 알랭 푸르니에의) <대장 몬>을 처음 읽었다. 크루소처럼 모래사장에서 발자국을 보고, 결국 이 섬에 내가 제일 처음 상륙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 이상한 체험이었다. <대장 몬>의 모든 행간마다 어른거리는 녹색의 유령은 내가 <마법사>에서 바라는 것과 비슷하다.
1088쪽 / 하디, <한 쌍의 푸른 눈>. 두 가지 점은 그의 조숙한 천재성을 잘 보여 준다.
1098쪽 / 나는 지금 존 클레어의 작품을 많이 읽고 있다. 오늘날 글을 쓰는 작가들은 모두 제2 혹은 제3의 존 클레어인 것이다.
시점에 대한 견해
일인칭 글쓰기. 이것 이외의 소설 창작 기법을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일인칭 글쓰기가 일종의 비겁한 태도인 듯하다. 언젠가 삼인칭 서술로 글을 써야만 할 것이다. 나는 늘 삼인칭 서술을 구식의 비현실적 서술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제는 그런 생각에 좀 의구심이 든다. 삼인칭으로 글을 쓰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ㅡ 존 파울즈
(이 작가가 얼마나 3인칭 전지적 시점의 불가피한 허세와 1인칭 주인공 시점에 따르는 무책임함을 결벽하게 꺼리는지 알 수 있다.) 소설의 화자가 편집자와 비슷해요. 1인칭 화자의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의 눈을 통해 어떤 사건을 서술하죠. 그 방식이 아니면 저로서는 소설을 쓸 수가 없어요. 흔히 한국소설의 문제점으로 3인칭 시점을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많이 지적하는데, 제겐 그렇게 쓰면 안된다는 오래된 생각이 있어요. 약간은 윤리적인. ㅡ 김연수
2010년 3월 30일 화요일
3월 21일 ~ 3월 31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줄리언 반스, <플로베르의 앵무새>(1984)_[100322] (2)
3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100330] (4)
4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5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6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7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8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9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10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1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2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3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4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 (2)15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 ] (1)
16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7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8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9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20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1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2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3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4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23일) 2주쯤 전에 이렇게 쓸 때만 해도 이렇게 금방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결국 다음과 같은 주절거림을 열흘 만에 무시하고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를 보게 된 건 결국 검색을 하다 우연히 발견하게 된 베짱이세실님의 이 포스팅 때문이었다. 이번에 2년여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면서 몇 가지 점을 알게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내가 어떤 소설을 처음 볼 땐 그 소설의 주제 혹은 소설의 의도에 굉장히 주목하면서 본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어떤 소설이 좋게 다가왔다면 반드시 한 번 더 봐야한다. 소설에는 주제나 의도밖에 없는 건 아니니까. 처음 볼 때 놓쳤던 것들을 다시 볼 때 하나하나 거둬들여야지.) 그밖에 이 소설은 정말 끝내주게 멋진 소설이라는 점과, 소위 진지한 소설을 쓴다는 인간들은 반드시 이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과, 처음 볼 때도 너무 좋아했지만 특히 열 번째 "기소" 챕터는 톡 뜯어내서 들고다니며 잘근잘근 씹어먹고 싶다는 점과, 2년 동안 나는 플로베르를 전혀 보지 않았다는 가슴 아픈 자책과... <추락>과 더불어 믿음직스러운 친구가 생겼다는 기분이다. 좋은 친구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30일) 어느덧 네 번씩이나 봤다.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이번에는 원서로 봤는데 오스카 파트에 비해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편지 파트는 상대적으로 조금 어려운 듯한 느낌을 받았... 윗 문단에서 친구라는 비유를 사용했는데, 이 소설은 내게 친구라기보다는 연인에 가깝다. 그래서 그저 사랑스울 뿐이다. 어쩌겠나, 그래서 이성적인 관점으로 소설을 읽어내는 게 몹시 어렵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해보자면, 소설만이 다룰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을 동원하여 소설이 굳이 다루지 않아도 되는 의도를 내포한 소설 정도? 이 소설이 생각 밖으로 인기가 없는 이유는 (물론 기법상의 낯섦도 한몫 차지하겠지만) 크게 봤을 때 아들과 아버지에 대해 다룬 소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이삼십대 여자 독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에서 아들과 아버지에 대한 소설이 <엄마를 부탁해>처럼 인기가 있을 리가 없... (착각인가?)
+ 헌책방에서 마르케스가 쓴 <칠레의 모든 기록>을 구입했다. 칠레에 대해 조금 더 아는 일은 볼라뇨의 소설에 조금 더 다가가는 일이 될 터이고 그건 결국... 그나저나 볼라뇨의 새 번역본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2010년 3월 27일 토요일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1 ㅡ 에서
늦잠을 자는 바람... 에라이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존 파울즈의 일기 정리.
(1950년)
80쪽 / 안전한 길로 들어서는 것을 경멸하라.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해결안이다.
ㅡ 머리로 아는 것과 몸으로 실천하는 것과의 괴리는 얼마나 큰가. 그러거나 말거나 요새 세상에 진정한 '안전한 길'이란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 안전하게 보이는 길에도 얼마나 많은 지뢰들이 묻혀 있는 사회인가.
107쪽 / 어떤 책이든 일정한 시간적 간격을 두고 세 번 정도 읽지 않는 한, 그 책에 대해 섣불리 평가를 내려서는 안 된다.
ㅡ 음... 두 번도 적다 이거지. 그래, 세 번.
134쪽 / 자신의 인생을 문학 창작의 도구로 삼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믿어야 한다.
ㅡ 서글프지만, 꼭 서글프다고만 할 수도 없는 이야기다.
(1951년)
144쪽 / 앞으로는 더 멋지고 더 세련되게 인생을 표현하는 일에 힘쓰도록 하자. 인생을 발견하려고 하지 말고.
ㅡ 일기든, 소설이든. 어차피 인생이 깊은 바닷속에 묻혀 있는 진주는 아니니까. 그런 게 존재하지도 않거니와.
161쪽 / 나는 글을 너무 많이 쓴다. 그것은 일종의 자기 학대다.
ㅡ 얼마나 많이 쓰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하다.
166쪽 / 우리는 함께 있으면 나른함과 부드러움이 전신을 감싸 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강력한 공감 같은 것. 우리는 서로에게 완전히 <얼이 빠졌다 abruti>고 말한다.
ㅡ 이런 감정을 못 느껴본 지가 벌써...
187쪽 / T.S. 엘리엇. 그의 견해를 반박한다는 것은 짜증이 날 정도로 불가능하다. 그는 모든 창작의 시금석이다. 스타일의 측면에서 보자면 그는 플로베르와 말라르메의 논리적 결론이다.
207쪽 / 나는 한 여자를 전적으로 사랑할 수가 없고, 지금 G를 사랑하는 것처럼 여러 여자를 사랑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른 여자들을 그녀보다 더 사랑할 수는 있을 것이나 결코 완벽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이유는, 내가 나 자신, 나의 미래, 나의 창조되지 않은 자아를 너무나 사랑해 나 자신을 완벽하게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257쪽 / 모든 나라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가 모두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영역 성서는 뛰어난 천재의 작품이다. 호메로스가 그리스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영역 성서는 영국인들을 위한 것이다.
ㅡ 2006년부터 매년 독서계획에 포함되어 있으나 4년 연속으로 실패하는 성경 읽기. 올해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 그나저나 한국인들을 위한 텍스트는 무엇이 있을까?
259쪽 / 자신의 상상력을 잘 조직하는 것은 창작으로 가는 핵심적 발걸음이다. 먼저 상상력의 결과물을 냉정하게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새로운 것, 새로운 쾌감, 새로운 조망은 그것이 새롭기 때문에 무조건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1952년)
331쪽 / 리얼리즘이라는 까다로운 테크닉을 모파상처럼 완벽하게 구사하는 작가는 없다.
347쪽 / 성교는 인생이 한 가지 목적일 뿐, 사랑이라는 것은 어리석은 개념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에서는 그런 견해가 거의 정상적으로 여겨지고 있다.
377쪽 / 프랑스 사람, 프랑스, 이 나라의 생활 방식, 그 언어에 대한 사랑. 프랑스인은 건전한 자기중심주의자들이다. 그들의 생활은 균형이 잡혀 있다. 그들은 영성(靈性)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동물성을 인정한다. 그들은 외국인을 받아들이고 판단하지만 그들에게 아첨을 하거나 비난을 하지는 않는다. 개인들로 구성된 사회, 황금의 중용(中庸), 고대 그리스의 정신을 계승한 현대인.
381쪽 / 훔치기는 스페인의 국민적 스포츠가 된 듯하다. 이것은 파시즘의 또다른 부산물이다. 위에서 힘으로 통치하니까 밑에서는 도덕적 해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ㅡ 비단 20세기 중엽 다른 나라의 일만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432쪽 / 말은 통제할 수 있었지만 눈은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녀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시선을 피하며서 말하는 것이었다.
ㅡ 으아 세상에나!
450쪽 / 나는 이제 독서량을 줄여야 할 때인 것 같다. 문학계의 중요 인사들을 대부분 알고 있으니까.
ㅡ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존 파울즈가 너무 부럽다. 난 아직 문학계 중요 인사들 중 반의 반도 보지 못했으니까. 한국에서 태어난 것도, 늦게 태어난 것도 죄가 될 순 없지 하하.
(역시 일부만 옮겨둔다.) 존 파울즈의 작품이라면 예에전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읽다가 별로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 절반쯤에서 덮었고, <컬렉터> 절판본을 구해 보긴 했으나 역시 내 취향은 아니었다. 수업 때문에 3년 전에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다시 봐야 했다. 심지어 발표까지 해야 했는데, 그때도 역시 별로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지는 않다. 지금 읽고 있는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2>를 다 보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역시 소설은 두... 번이 아니라 세 번은 보고 말해야... 특히 나처럼 비평적 관점이 부실한 독자라면.
아래는 <프랑스 중위의 여자>에 대한 잡담. 리뷰를 쓴 것도 같은데 찾을 수가 없...;; 역시나 2007년 가을에 썼다. 괄호 안 별표 속 얘기는 당시에 쓴 것이고, 샵 뒤의 얘기는 지금 쓴 것.
펼쳐두기..
추석 때부터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느긋하게 읽고 있는데 가능한 빨리 다 읽어야겠다. 다름이 아니라 이 소설에 대해 조별 발표를 해야하는데, 나는 비평 부분을 맡았고, 아무튼 오늘 수업 시간에 조장이 말하길 - 다음 주까지 대강 정리해서 보자꾸나. 다행히 내일은 휴일이고, 목요일 금요일이 학교 축제라 완독하고 자료 정리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겠다. 이 정도만 쓰고 넘어가려니 왠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 2년 전쯤에 쓴 이 소설의 감상문을 발췌.
결국, 어쩌면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존 파울즈의 <프랑스 중위의 여자>를 절반쯤 읽은 후 덮어버렸다. 영미문학은 이상하게도 그렇다. (*얼마 본 것도 없으면서 이런 소리를 잘도 해놨다;;) (# 모르면 용감할 수 있다!) 초반엔 굉장히 재미있게 보다가 시나브로 그 가독성이 떨어지고는, 전체 내용의 반 정도 왔을 때 책 읽기를 그만둔다. 왜 그런지는, 도무지 알 수 없다 - 며느리를 둬봤자 그녀도 모를 테지. (*그땐 몰랐는데 지금은 조금 알 것도 같다. 그 이유는 내가 무지했기 때문이다. 이 소설을 두 번째 보며 절실하게 와 닿았던 성귀수의 이 말. "명성 있는 작품에 실망했다면 본인 무지의 소치"(대략 이런 식의 말이었다.))
이 책과 처음 만난 건 2003년 늦가을 무렵이었는데, 한 친구가 자기 수업시간에 이 소설로 공부한다면서 말해 주어 알게 되었다. 그땐, 그냥 그렇구나, 정도로만 알고 있다가 나중에 김영하의 산문집 <포스트잇>에서 이 소설을 다시 발견할 수 있었다. (# 김영하에 혹해 그의 '모든' 글을 읽어보던 시기. 작가로서의 김영하에게 지금은 그닥 관심 없음.)
보다 말았기에 내용을 다 알지도 못할뿐더러 아는 내용만 구구절절 서술하는 것도 우습기에 - 마치 비둘기의 구구구구 울음소리처럼(* 아, 유치한 말장난 하고는;;) - 내용 얘기는 생략하고, 중요하다 싶은 것 몇 가지만 짚어봐야겠다.
이 소설은 메타픽션으로, ‘전후에 등단한 작가들 가운데 가장 독창적이고 장래가 촉망되는, 그리고 셰익스피에어세 D.H. 로렌스로 이어지는 영국 문학의 위대한 전통을 가장 확실하게 재창조해 나갈 수 있는 작가’라는 극찬을 받은 존 파울즈가 ‘다소 시대에 뒤떨어진 영국 소설의 전통에 형식적 혁신을 접목시’킨 것이다.
그는 각 장(章)을 시작하기에 앞서, 여러 서적에서 인용한 문구를 간략하게 적어 놓았다. 그 장의 내용과 관련 있는 글의 구절들로, 모두 이 소설의 배경인 19세기 중엽에 나온 책들에서 차용한 글귀였다. 많은 책을 섭렵한 후 그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쓴 소설임을 알 수 있다. 작가의, 소설에의 치열함을 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그러나 그의 문장은 그닥 무겁지 않다. ‘만큼, 같은, 처럼, 듯한’ 등의 단어를 사용하여 꽤나 신선한, 그러면서도 객관성을 겸비한 수식을 한다. 마치 레이먼드 챈들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참신함과도 같은 그런 비유. (*지금은 조금 입장이 다른데, 그리 참신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그저 현학적인 말장난을 좋아하는 작가구나, 라는 생각이 조금 들 뿐.)
이 책을 다 읽지 않아도 다 읽은 듯한 만족감을 느낀 이유는 13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시 지금과 차이가 있는데, 41장까지 읽은 현재, 13장에 대한 인상이 그리 강하게 남아 있지는 않다. 13장을 보며, 아, 예전에 이 부분이 좋았었지,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냥 그 정도였다.) ‘나는 모른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는 모두 상상이다.’라고 시작하는 이 장에,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에의 의식이 다 담겨 있기 때문이다. 소설, 창조, 그리고 소설가라는 단어에 대한 작가 본인의 자의식을 화자의 입을 빌려 고스라니 서술하고 있다. 어차피 13장에서의 화자는 작가 자신이라 여겨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완독도 하지 않은 소설을 가지고 주저리주저리 떠드는 것도 이 정도에서 마치는 것이 좋을 듯싶다. (* 정말, 그래야 한다.;;) 어쨌든, 내가 읽든 말든 소설 속 주인공들은 ‘다른 자유들도 존재하도록 허용하는 자유’를 얻어 마음껏 행동하고 말하고 생각할 테니 말이다.
(# 다시 읽고 나면 어떤 생각(느낌)이 들지 궁금하군)
2010년 3월 26일 금요일
통의동에서 책을 짓다에서 몇 부분
73쪽 /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읽고 싶은 책 리스트 보내면 책을 사서 택배로 보내 줄게." (* 구정에 만난 형제들에게 홍지웅이 한 말)
ㅡ 나도 읽고 싶은 책 리스트 보내면 사서 보내주는 사람 주위에 있으면 좋겠... 내 취미가 책 리스트 만들긴데!
168쪽 / 나는 한국사의 경우, 대부분의 역사는 이미 배운 게 있으니까 감이 있을 테고 결국 사관이나 역사 인식이 문제일 텐데, 그런 것은 강만길 교수의 <고쳐 쓴 한국 현대사> 같은 책들만 꼼꼼하게 읽으면 전체적인 시각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굳이 학회 활동이 필요하겠느냐며 경제사회학회에서 활동하는 게 유익하겠다고 권유했다. (* 한국사연구회에서 활동하고 싶다는 딸에게 홍지웅이 했던 말)
ㅡ 챙겨서 봐야겠다.
319쪽 / 이세욱 씨가 프랑스 오를레앙에서 공부할 때인데 교수가 "셰익스피어를 읽어 보려면 위고가 번역한 책을 읽으라"고 추천하더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위고는 실제로는 영어를 거의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고의 번역본은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작가의 의도나 문장의 분위기를 아주 탁월하게 소화한 번역의 전범으로 평가받고 있단다. 나는 이세욱에게 번역에 얽힌 에피소드를 어느 잡지에든 게재했다가 나중에 단행본으로 내자고 제안했다. 이세욱은 그러자고 했다.
ㅡ 우선 셰익스피어를 읽고 내년부터 불어를 다시 공부하고 내후년쯤 위고가 번역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지. 참, 사람 일이 말처럼 이렇게 착착 되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세군의 말에 의하면 이세욱 번역은 너무너무 좋다는데, 그래서 최근에 만날 때마다 이세욱 얘기를 들었는데, 저 번역 관련 에피소드는 언제쯤 단행본으로?
(안 그래도 존 파울즈와 관련해서도 <태풍>은 좀 꼭 읽어보고 싶은데... <로빈슨 크루소>도 이래저래 다시 봐야 하고. <로빈슨 크루소>와 엮이는 작품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이쯤해서 2007년 2학기 때 쓴 <로빈슨 크루소> 관련 과제 일부 첨부.)
뭐 굳이 이런 걸...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처음 의식되었던 건 번역에 관한 문제였다. 정말 문제가 많은 번역이었다. 아이러니 한 건, 번역자가 한국 문학계의 원로인 김병익이었다는 사실. 글쓰기에 관해서라면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인물이 아닌가. (*아닐지도...;;) <영미명작, 좋은 번역을 찾아서>라는 책을 보면 <로빈슨 크루소>의 번역 중 추천본은 없었고 그중 김병익의 번역본에 대해서만 아주 간단히 언급했는데, 생략된 문장이 있다느니, 어려운 번역은 대충하고 넘겼다느니 하는 말이었다. 게다가 비문은 물론이거니와, 개인적인 느낌으론 번역기로 그냥 돌린 듯한 문장들도 보였다. 그럴 리가 없을 거라 생각하고 나는 일전에 발생했던 대리번역 문제를 떠올렸다. 이름만 김병익이지, 실은 학생들의 대충한 번역이 아닐까. 하지만 역자 후기에서 오해는 금세 풀어졌다.
“20여 년 전에 번역한 것이라(93년에 쓴 글이니 대략 70년대 초반에 했던 번역이다) 오역은 물론 문장 자체도 묵은 꼴이어서 계제에 손을 다시 대어 고쳐보고 싶은 마음이 응당 크지 않을 수 없었지만, 책을 빨리 내려는 출판사측의 사정도 있고, 나 자신도 새삼 원문과 대조하며 역문에 손을 댈 만한 충분한 겨를도 없어 원래대로 그냥 출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내 스스로도 서운한 일이거니와 누구보다 이 책을 읽어줄 새 독자들에게는 면목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간의 경위야 어떻든, 이 책을 읽고 그 번역에 불평을 가질 분들에게 죄송스럽다는 변명을 해야 할 사람은 어느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일 것이다.” ㅡ 할, 말이 없다.
소설은 작중 화자가 후대에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기록하는 방식으로 씌어졌다. 일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솔직하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게다가 자세한 묘사도 볼만 했다. 섬에서 혼자 살면서 이것저것 만들었는데 그때마다 상세한 설명과 당시의 심정이 잘 담겨 있었다. 러시아 문학연구자 이현우(*알라딘 블로거 로쟈)는 (*<소문>에서) “근대 소설이란 무엇인가?”라 자문하고는 “짚신 두 짝이다”라고 답했는데 여기서 짚신이라 함은, 한 짝은 리얼리티(현실)요, 다른 한 짝은 디테일(세부 묘사)을 의미했다. 위의 구절과 연관시켜 내가 의문스러웠던 건 이 소설을 과연 근대소설의 범주 안에 넣을 수 있냐는 점이었다. 디테일이라면 어느 소설에 뒤지지 않겠지만 이 소설에서 과연 리얼리티가 잘 드러나고 있는가에 대해선 확신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난 이 소설이 판타지 소설처럼 보였다.
대저 좋은 소설이라 하면, 인간(혹은 삶)에 대한 눅진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만) 장르적으로 판타지 소설이라 분류되는 몇몇 소설들이 후대에까지 꾸준히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 점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로빈슨 크루소>에선 인간(혹은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동반되지 않는다. 그저 기상천외한 상상력만이 도두보일 뿐이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 되기 위해선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홀로 남겨진 뒤 그에게 나타날 변화에 주목했어야 한다. 심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현대의 인간이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은 끝이 나겠지만 300여 년 전의 인간이라면 조금 더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찌됐건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죽을 거란 건 명약관화한 일이다. 인간은 사람들과 사이에서만이 그 존재가 증명되고, 또 살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로빈슨 크루소는 다르다. 대개의 사람이라면 외딴섬에 홀로 남겨졌다는 걸 인식하는 순간 몇 차례 절망에 빠질 법도 한데, 그는 대번에 먹고 살 궁리를 한다. 좌초된 배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수해 오질 않나, 이것저것 부지런히 만들어내질 않나. 아무리 300여 년 전 인간이라지만 이건 좀 너무하다 싶었다. 그러므로 나에게 로빈슨 크루소는,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해리포터와 다를 게 없었다. 로빈슨 크루소를 초인적 개인주의의 신화로 보는 것보다는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 제목을 따와 ‘환상 속의 그대’라고 보는 게 더욱 적합한 듯싶었다. 묘사되는 로빈슨 크루소의 삶은 현실이지만 로빈슨 크루소라는 인물 자체는 환상 속에서나 존재할 만한 인간이었다. 놀라운 작가의 상상력이 그저 대단하게만 여겨졌다.
그런 이유로 이 소설이 유독 아동용 버전으로 많이 출판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아이들에게,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설명하는 것보다 우스운 일은 없다. 마찬가지로 삶이 무엇이냐 떠드는 것도 곤란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무한히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주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런 역할로서 소설만큼 뛰어난 게 없고, 특히 이 <로빈슨 크루소>는 그 임무를 완수해내기에 충분한 소설이다.
(* 당시 교수님의 과제 채점 방식에 반발해서 이런 식의 비꼬는 글을 많이 썼던 것 같다. 어찌된 영문인지 교수님은 내 과제에 좋은 점수를 주셨... 하하.)
(* 헉! 놀라운 일! 이 글을 첨부하고(3월 28일이고, 대략 오후 12시 즈음) 방금 막(오후 12시 26분) 이 교수님에게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진짜 신기한 일일세. 거의 두어 달 만의 연락인 듯. 대학 졸업 후에도 유일하게 연락을 주고받는 교수님.)
407쪽 / "나는 요즈음 소설 창작보다는 외국 문학 번역을 통해서 한국 문학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 "존 파울즈의 소설을 통해서 진정 소설 쓰기가 무엇인지를 배웠다." (...) "존 파울즈는 번역하는 데 너무 힘들어서 번역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작년(2003)에 나온 <일기Journals>라도 번역해 보자고 하니까 그건 책을 검토한 뒤에 생각해보잔다. (* 열린책들 권향미 주간이 번역가 김석희에게 소설 쓸 생각 접었냐고 묻자 김석희가 한 대답.
ㅡ이 대목 덕분에 최근 번역 출간된 존 파울즈의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을 보게 되었고 지금 보고 있다. 결국 이 책은 김석희가 아니라 번역가 이종인이 번역했다.
506쪽 / (*번역 및 번역자와 관련된 얘기를 몇 마디 하다가) 결국은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해야 하는데, 번역자들도 기본적으로는 "자신은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세욱은 "원작에 충실하게" 번역하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따져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세욱은 그래서 우리가 기획하고 있는 번역학 총서에 번역 이론서보다는 차라리 번역 야사 성격의 책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프랑스에서의 호메로스의 번역, 불경의 번역, 삼국지의 번역 등 오히려 번역에 얽힌 에피소드들을 모아 책을 내는 게 더 의미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했다.
ㅡ 왜 이야기만 하고 책은 안 나오는 것임?
583쪽 / (* <희망의 원리>에 대해) 헤르만 헤세는 "오늘날의 시민 사회의 문화를 진단하고 해부한 역작으로 일반적인 사회주의 문헌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을 갖추고 있다"고 했고, 조지 스타이너는 "20세기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했다.
ㅡ 그렇군!
585쪽 / 창비, 민음사, 문지처럼 (* 요새 제일 잘나가는 문학동네는 5,6년 전만 해도 듣보잡이었음? ㅎㅎ) 문학 잡지도 내면서 작가들을 발굴하고 또 제대로 관리할 자신이 없어서 한국 문학은 접었다.
ㅡ 그렇군!
708쪽 / 세 번째 제안. 출판물의 띄어쓰기나, 외래어 표기법 편람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얘기했다. "한글 맞춤법 문제는 국어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고, 언어권마다 외래어 표기법도 이견이 있지만 최소한으로 교정 편의상 통일을 하겠다는 거다. 예를 들면 어떤 출판사에서 여섯 권짜리 전집을 내면서 한 출판사의 A, B, C 세 편집자가 두 권씩 교정을 보았는데, 띄어쓰기가 A, B, C가 서로 달라서 애를 먹은 적이 있다. 국가적인 인력 낭비, 시간 낭비다. 출판사의 주간이나 편집장들이 모여서 서로 세미나를 통해 의견을 수렴해서 "통일안"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다. 국립국어원이나 관련 단체와 공동 작업을 통해 끊임없이 표준화시켜 갈 필요가 있다. SBI에서는 앞으로 교정 표준화 작업 외에도 이를 토대로 시험제도도 만들고 전문가도 양성할 예정인데 적극 도와달라."
ㅡ 우리나라에선 특히 책 만드는 데 드는 시간 낭비가 너무 심한 것 같다. 출판사별로 편집 매뉴얼이 다른 건 당연하거니와, 실제로 책임편집자가 누구냐에 따라 같은 출판사임에도 미세하게 띄어쓰기가 다른 경우가 있다. 진짜, "통일안"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는데 언제쯤이나 실현이 가능할지.
표시해둔 곳은 이보다 좀 더 되는데 이 정도만 옮겨둔다. 이밖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내용은 김연경이 고골 전집을 열린책들에서 내기로 했다는 (아마도 구두의) 계획. 헌데 그 이후 번역 출간된 책은 민음사에서 나온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과 <지하로부터의 수기>뿐. 고골 번역 계획은 접힌 건가?
그나저나 뭐랄까, 들리는 홍지웅과 보이는 홍지웅은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두 개 다 진짜 홍지웅이겠지 뭐.
2010년 3월 19일 금요일
3월 11일 ~ 3월 2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3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4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5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6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7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8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9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0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1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2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3위. 마크 해던,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2003)_[100318] (2) (NEW)14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 ] (1)
15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7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7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8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9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20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1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2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3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18일) 마크 해던의 소설을 작년에 보고 다시 봤다. 구문이나 단어가 어렵지 않은 편이라 원서로 봤다. 초반에 느껴지는 에너지를 끝까지 못 살린 듯한 느낌이다. 적당히 가족 모두 해피엔딩, 식으로 끝맺기보다는 좀더 화자의 내면에 집중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만 그건 뭐 순전히 내 생각이고.
+ 좋든 나쁘든, 고작 한 번 읽고 소설을 판단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
2010년 3월 11일 목요일
존 파울즈의 일기에서
존 파울즈가 20대 중반이던 시절 만나던 여자가 해준 이야기. <나의 마지막 장편소설 1> 165쪽에 나온다. (제목에 '소설'이 있지만 이건 엄연히 일기다.) 일종의 심리 테스트라고 할 수 있다.
"강의 양쪽 둑에 다섯 채의 집이 있다. (*책에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부연하자면, 강 왼쪽엔 A와 B의 집이, 오른쪽엔 C,D,E의 집이 있다.) 유일한 연결 고리는 나룻배를 운영하는 집인 D이다. E는 여자인데 A와 약혼했다. B는 E를 짝사랑하는 남자다. 어느 날 E는 약혼자 A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D를 찾아갔으나 마침 집에 없다. 그녀는 C를 찾아가서 그의 조언을 구한다 그는 강에 홍수가 나서 위험하니 집에 있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D를 찾아내어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물이 불어난 강을 보더니, 그녀가 몸에 걸친 것을 모두 내놓는 조건이라면 도와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동의한다. 그는 그녀를 강 건너편으로 데려다 주지만, 그녀는 이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다. E는 A의 집으로 간다. 하지만 그는 집에 있지 않다. 당황한 그녀는 B의 집으로 가서 좀 있게 해달라고 말한다. B는 그녀를 집 안에 들여놓고 옆에 앉으라고 말한다. 그는 그녀에게 옷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그녀를 만지지는 않는다. 그때 A가 B의 집으로 왔다가 약혼녀가 알몸으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을 발견한다. 그는 화를 내면서 파혼을 선언한다.
당신은 어떤 순서로 이 사람들을 존경하는가? 누가 가장 존경스럽다고 생각하는가?"
답을 내렸으면 클릭
"그 대답은 다음과 같은 상징을 어느 정도 중시하는가를 보여 준다. A는 도덕 혹은 관습, B=모험심, C=이성, D=물질주의, E=는 사랑. 나의 선택은 EBCDA였다."
나의 선택도 EBCDA였다. 다른 건 몰라도 D(=물질주의)를 존경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다른 것보다 사랑을 가장 중시하는 나는야 역시 로맨틱 가이...면 뭐하나 지금 내 상황이 이런데.txt
동네 할아버지 같은 존 파울즈


2010년 3월 10일 수요일
주절주절
국어사전에 대한 중요성을 이제야 깨닫고 업계(?)에선 명성이 자자한 <보리 국어사전>을 저렴한 가격으로 얼마 전에 구입했다. 하루에 열 페이지씩 반년간 꾸준히 봐 매년 두 번씩 완독하자는 심정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첫날부터 그만! ... 그만두어버렸다. 반년 계획은 나에겐 아직 무리다. 고작 한달 계획을 세워도 수 차례 변경하는 인간이 반년은 무슨... 초중등학생을 위한 사전이고는 해도, 거기에 수록된 단어들만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알아도 충분히 좋을 글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으나, 읽어가는 도중 찾아오는 압도적인 회의감이... 초등학교 학급회의도 싫어할 만큼 회의적인 사고를 싫어함에도 어쩔 수 들이닥치는 그런... 이 사전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중학교에 입학한 사촌동생에게 선물로 줄까;)
당분간 한국어로 쓰인 소설을 읽지 않겠다! ... 고는 해도 과연 지킬 수 있을까. 사람이 자신의 욕구를 다 충족시키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특히 이루고 싶은 바가 있다면 그것을 위해 다른 몇 가지들은 과감히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 라고 말은 이렇게 쉽게 내뱉지만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한국 작가의 소설은 외국어로는 볼 수 없으니 예외로 두겠다. (이제 본격적으로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을 시간이 온 것인가;) 볼라뇨도 예외. (예외가 얼마나 늘어날지 모르겠;; 그보다 이 문단이 언제 통째로 사라질지 모르겠;;) 복합적인 의미인데, 소설을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조금쯤 자유로워졌으면 좋겠다.
2010년 3월 9일 화요일
3월 1일 ~ 3월 10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3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5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6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7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8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2)
9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0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1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2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4위.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암병동>(1968)_[100309] (1) (NEW)
15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6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7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19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20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1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2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9일) <암병동>은, 신선하거나 독특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잘만 다루면 꽤 매력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구조로 쓰인 소설이다. (세군의 말에 의하면 이와 유사한 소설로 카뮈의 <페스트>가 있다고 하는데 조만간 한번 읽어봐야겠다.) 굳이 이 소설의 특징을 다른 소설과 비교해보자면 이보 안드리치의 <드리나 강의 다리>과 할 수 있겠는데, <암병동>이 공시적인 측면에서 암병동 내의 사람들 개개인을 통해 당대의 러시아를 보여주고 있다면, <드리나 강의 다리>는 통시적인 관점으로 드리나 강 주변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발칸 반도 400년 역사를 가로지른다. (너무 억지스럽군;)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고리키(밑바닥)에서 시작되어 솔제니친(수용소)에서 끝났다고는 하지만 하나의 '주의'로 소설이나 작가를 판단하는 건 간편한 동시에 안일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내가 러시아인이었다면, 혹은 20세기 러시아에 대해서 잘 아는 독자였다면 이 소설이 재미있었을까? (잘 모르겠다.) 좀 오버해서 말하자면, 겨우 다 읽었다.
(10일) 최수연이 옮겨 열림원들에서 출간된 허먼 멜빌의 <빌리 버드>를 읽다가 2장까지 보고 덮어버렸다. '번역'이라는 행위에 대해서는 왈가왈부할 만한 처지(입장/주제)가 못되지만 아무리 그래도 28페이지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문장은 좀 너무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오늘날 널리 무시당하고 있는 인간의 타락과 원죄라는 교리를 확증하려는 것으로 보일지는 몰라도, 원시적이고 때묻지 않은 덕목들이 누구든 문명이라는 겉옷을 입고 있는 어떤 사람을 특별히 특징짓는 경우, 자세히 살펴보면 그 덕목들의 관습이나 인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러한 관습이나 인습에서 벗어나 있는 것ㅡ실로 마치 카인의 도시와 도시화된 인간이 나타나기 이전이 시대로부터 예외적으로 대물림된 것ㅡ으로 나타나리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문장이 단 한 문장이라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나는 내 한국어 독해력에 대해 심사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아무리 그래도 29페이지에 있는 다음의 짧은 구절은 또한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우리의 멋쟁이 선원은 어디에서든 찾아보리라고 기대할 수 있는 것 못지않게 대단한 남성미를 갖고 있었지만," 남성미가 도대체 어떻다는 말인지. 한국어를 읽는 데 자괴감이 느껴져 이럴 바엔 아예 원서를 직접 보는 게 낫겠다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이것이 번역자가 이 소설을 번역하며 독자들에게 실제로 원했던 것일지도 모르겠고.
2010년 3월 7일 일요일
횡설수설하는 플로베르의 앵무새
배고프다. 진작 안 자고 왜 이 시간에 배고프다 투덜대는 거냐. 난 언제쯤 1시 전에 잠잘 수 있을까. 블로그에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어 뭐라도 끼적대고 싶었으나 고작 한다는 말이... 거의 한 이 주째 한 시 전에 잠자는 데 실패하는데, 이게 전부 책 때문이고 인터넷 때문이다. 저녁 먹고 서점에서 <씨네21>에 실린 천명관 인터뷰를 후다다다닥 봤는데 마지막 천명관의 대답에 줄리안 반즈, <플로베르의 앵무새>가 나와 너무 반가웠다. <플로베르의 앵무새>도 읽은 지 벌써 2년이나 됐다. 아래는 2년 전에 휘갈긴 흔적.
플로베르의 앵무새와 관련된 횡설수설
(드디어) 줄리언 반스의 <플로베르의 앵무새>(보급판)를 보았다. 이 소설은 내가 얼마나 소설에 친숙해졌는가를 가늠하게 해준다. 처음 이 소설을 보다가 만 4년 전보다는 확실히 친숙해졌다. 이 소설은 플로베르에 대한 "인간적이고 깊이 있는 이해를 훌쩍 뛰어넘어 독자들에게 소설이라는 예술장르를 읽을 때 펼쳐지는 감정의 모든 양상을 재인식하게" 함은 물론 "문학 비평이나 문학적 상상력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좋은 문학 수업이 될 것"이다. 더불어, 플로베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보면 좋을 듯. <마담 보바리>를 재미있게 보지 않았더라도 플로베르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장 볼 것. (특히 '10. 기소' 챕터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에 관심 있는 사람 또한 봐두어야 한다. 물론 줄리언 반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봤을 것이고... 소설 보면서 하고 싶었던 말들은 다 어디 가고 이런 이상한 얘기만 늘어놓게 되어 머쓱한데 그래서 인상적인 몇 부분 발췌.
"엘렌. 나의 아내. 죽은 지 백 년 되는 어느 외국 작가(*플로베르)에 대해서 이해한 것보다도 더 이해하지 못한 사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이상한 것인가, 정상인가? 책은 그녀가 이러저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삶은 그녀가 한 행동만 말한다. 책은 일어난 일을 설명해 주는 곳이고, 삶은 설명이 없는 곳이다. 삶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나는 놀라지 않는다. 책은 삶을 의미 있게 한다. 유일한 문제는 책이 의미를 부여하는 삶은 당신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이라는 점이다."(209p) -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대목, 이지만 소설을 읽지 않으면 잘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을 듯.
"1) 아실-클레오파 플로베르는 그의 둘째 아들과 논쟁을 하다가, 아들에게 문학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고 물었다. 귀스타브는 외과의사인 아버지에게 질문으로 응수하면서, 그럼 비장(脾臟)은 무엇을 위해 있는 것이냐 되묻고는, <아버지가 그것에 관해 모르시듯 저 역시 모릅니다. 다만 비장이 우리의 몸에 필수적이듯, 시(詩)도 우리의 정신에 필수적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고 했다. 의사 플로베르가 졌다.
2) 비장은 임파성 조직(또는 백수질)과 혈관망(또는 적수질)의 단위들로 구성되어 있다. 비장은 수명이 다됐거나, 상처받은 적혈구를 핏속에서 제거하는 중요한 기능이 있다. 비장은 항체를 형성하는 역할을 하는데, 비장을 적출당한 사람은 항체 생산이 감소된다. 터프친tuftsin이라고 불리는 테트라펩타이드는 비장 속에서 만들어진 단백질에서 나온다는 증거가 있다. 특히 어린 시절에 비장을 제거하면 뇌막염이나 패혈증에 걸릴 확률이 높지만, 오늘날에는 더 이상 비장을 필수 기관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 이유는 비장을 적출당하더라도 인간의 활동 기능이 크게 손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사실에서 당신은 어떤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가?"(217p) - 플로베르의 멘트를 빌려 문학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도대체 이토록 precise한 비유라니.
"플로베르는 달랐다. 그는 문체를 믿었다. 어느 누구보다 그랬다. 그는 아름다움과 음향과 정확함, 그리고 완벽함을 달성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러나 와일드와 같은 작가들이 취한 도안식(圖案式) 완벽함을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문체는 주제가 끌고 온다. 문체가 주제에 얹히는 것이 아니라, 주제에서 발생한다. 문체는 사고의 정확한 반영이다. 정확한 단어, 분명한 어구, 완전한 문장은 항상 <저쪽> 어딘가에 있다. 작가의 임무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그것을 찾는 일이다." (109p) - 이건 플로베르를 말해주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다시 보고 싶은데 언제쯤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책 보는 시간은 늘 한정적인데 보고 싶은 책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서 여러 모로 속상하다. 지금은 솔제니친의 <암병동>을 보고 있는데 모레쯤이면 다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꺼운 책이기는 하지만, 다른 책들도 같이 보고 있다고는 하지만, 다 보는 데 2주나 걸리다니;; 두꺼운 책 보느라 수고했으니 이후 멜빌 형님의 중편을 하나 보고 도선생의 작품으로 들어가야겠다...만 그 사이 맘이 또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
2010년 2월 27일 토요일
2월 20일 ~ 2월 28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3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5위. 하 진, <전쟁쓰레기>(2004)_[100225] (1) (NEW)
6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7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8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2)
9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10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1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2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4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5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6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1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19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20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1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25일) 하 진의 소설을 읽으면서 김연수의 <밤은 노래한다>와 김영하의 <검은 꽃>이 떠올랐다. 김연수 소설의 경우, 연재본은 연재본 대로 단행본은 단행본 대로 조금씩 아쉬운 부분이 있고, 김영하 소설의 경우... 서문과 친구의 말에 의하면 후반부는 어설픈 중남미 스타일이라고 했던가. 둘 다 이미 두 번씩 읽은 소설이지만 올해 내로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개인적으로 하 진의 <전쟁쓰레기>처럼 굳이 소설이라는 서사 장르가 아니어도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에는 크게 끌리지 않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쓴 이야기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대단한 에너지가 있다. <기다림> 때도 그랬거니와, <전쟁쓰레기>를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휘몰아치는 어떤 감정이 느껴졌다. 그것은 이를테면 소설의 고전적 미덕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이 소설은 외국인이 한국을 배경으로 쓴 소설이 아닌가. 읽는 내내 도대체 이 작가는 자료 조사를 얼마나 꼼꼼이 했을까 하는 생각을 그치지 않았다. 원서를 찾아보면 되긴 하지만 한국어 번역본엔 하 진이 참조했다는 도서목록이 나와 있지 않아 아쉬웠다. 왕은철 교수가 직접 번역한 게 맞는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 드문드문 있었지만 내 섣부른 추측이겠지 뭐... <기다림>과 <전쟁쓰레기>는 비슷한 듯 다른 소설이며, 각각의 주인공들은 다른 듯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두 작품은 각각 2000년, 2005년 펜/포크너상 수상작이다.
리스트 일차 목표였던 30위까지 작성하기 위해 앞으로 남은 소설 아홉 편.
2010년 2월 20일 토요일
돌고 돌아
다른 두 나라의 작가가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서 만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추측을 해보는 것만큼 설레는 일이 없다. 이를테면 미국에서 영어로 소설 쓰는 중국 태생 하진의 <전쟁쓰레기>에 나오는 주인공 중국인과, 한국에서 한국어로 소설 쓰는 한국 태생 김연수의 단편 "뿌넝숴"에 나오는 주인공 중국인은 대단히 비슷한 시기에 한국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만 시기상 만났을 가망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리고 새로운 소설은 그런 추측들이 쌓이고 쌓여 탄생하는 거겠지.
미루고 미뤄왔던 하진의 <전쟁쓰레기>를 (처음 접한 지 3년 만에 드디어) 읽을 생각을 하니 감회가 새롭... 번역본이 나오기 전인 2007년 번역 수업 시간에 처음 접하게 됐는데(물론 당시엔 삼분의 일 정도밖에 보지 못했고), 거제 포로수용소 얘기도 있고 해서 당장 좀 읽어볼 예정.
뜬금없는 얘기기는 하지만, 2년 전까지 김연수의 골수팬으로서, 지금까지 김연수 최고의 작품은 <나는 유령작가입니다>라고 생각한다. (올해 내로 다시 읽어봐야지.)
김연수의 번역본 중에 하진이 쓴 <기다림>이 있어서 하진이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고, 하진이 쓴 작품 대부분을 왕은철이 번역하여 왕은철이라는 번역가(겸 교수)를 알게 되었으며 왕은철이 번역한 작품을 찾아 읽다가 쿳시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이렇게 돌고 도는 거지.
작년에 한국에 출간된 소설 중 기대중인 작품들을 당장(신간으로) 사지는 못하고 목록만 만들어뒀는데 온라인 헌책방을 뒤적이다가 그중 세 권을 발견하여 구입했다. 오로지 맨부커상 수상작이라는 이유로 아라빈드 아디가의 <화이트 타이거>, "여러분 책장에 꽂혀 있는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옆자리를 좀 비워놓으시라"는 추천사 때문에 사샤 스타니시치의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 몇몇 리뷰들에서 받은 인상만으로, 그러니까 순전히 감으로 토마스 브루시히의 <그것이 어떻게 빛나는지>. 물론 이 소설 세 편 다 내 책장에 얌전히 꽂혀 있는 다른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읽힐지는 모를(그러나 반드시 읽힐), 현재로선 그런 처지. 나보코프의 <사형장으로의 초대>가 헌책방 사정상 값작스레 사라진 바람에 못 와서 좀 아쉬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저렴한 가격에 만나겠지 뭐.
2010년 2월 18일 목요일
빌리티스의 노래
"볼라뇨는 성애 문학과 고딕 문학에도 뚜렷한 관심을 보였다. 그는 처음 훔친 책이 피에르 루이스의 얇은 책이라는 것은 기억했지만 그것이 <아프로디테>인지 <빌리티스의 노래>인지는 확실히 기억하지 못했다." (<볼라뇨, 로베르토 볼라뇨> 57쪽)
"교수는 책을 보더니 혀를 차더군요. <빌리티스의 노래>가 근대적인 성애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이기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한국에서 출판됐을 줄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빌리티스의 노래>는 피에르 루이스가 쓴 산문시집입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306,307쪽)
ㅡ 이렇게 만나는 거지.
2월 10일 ~ 2월 19일
1위. 존 쿳시, <추락>(1999)_[100208] (2)
2위. 커트 보네거트, <제5도살장>(1969)_[100206] (2)
3위. 이언 매큐언, <토요일>(2005)_[100115] (1)
4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2005)_[091206] (3)
5위. 로베르토 볼라뇨,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1996)_[100214] (1) (NEW)
6위. 로베르토 볼라뇨, <칠레의 밤>(2000)_[100216][100218] (2) (NEW)
7위. J.M. 쿳시, <슬로우 맨>(2005)_[100110] (1) (NEW)
8위. 라위 하지, <드 니로의 게임>(2006)_[100111] (1)
9위. A.M. 홈스, <이 책이 당신의 인생을 구할 것이다>(2006)_[100127] (1)
10위. 김사과, <미나>(2008)_[091216] (1)
11위. 천명관, <고래>(2004)_[091203] (2)
12위. 코맥 매카시, <로드>(2006)_[100108] (2)
13위. 에밀 졸라, <쟁탈전>(1872)_[100124] (1)
14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1925)_[091221] (2)
15위. J.M. 쿳시, <어둠의 땅>(1974)_[100110] (1)
1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1988)_[091214](2)
17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1985)_[091209] (2)
18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1982)_[091208] (2)
19위. 하인리히 뵐, <9시 반의 당구>(1959)_[100118][100121] (2)
20위. 김연수, <바다 쪽으로 세 걸음>(1부연재)(2009)_[091229] (1)
(10일) <슬로우 맨>에 대해선 여기서 떠오르는 대로 주절거렸으니... 쿳시의 경우, 나이가 들어감에따라 이전 작품들에서 보였던 강렬함이 조금씩 약해지는 것 같아 개인적으로는 쵸큼 아쉬움. 나이보다는 이주의 문제가 더 크게 작용한 건지도 모르겠지만. 작년도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써머타임>을 기대해봐야징.
(14일) 좀 더 알았으면 좀 더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아메리카의 나치 문학>을 읽는 내내 들었다.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을 보고 나서 든 생각과 유사하다.) 세군에 의하면 여기 나온 인물들은 (완전히 허구의 인물이라기보다는) 실제 작가들의 패러디적 성향이 강하다고 하는데(그러면서 한국 작가들의 예를 들기도 했고)... 음, 아무튼 궁금한 점이 많다. 예전에 세군과 대화중에, 굳이 자주 만나거나 많은 대화를 나눠보지 않아도 직관적으로 '내 과'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는 식의 얘기를 했는데, 나에겐 볼라뇨가 그렇다.
(16일) 아주 들뜬 맘으로 읽기 시작한 <칠레의 밤>, 다시 읽어야겠다. 다른 건 모르겠고, 볼라뇨는 문학이 무엇을 해야 하며 소설이라는 장르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만의 인식이 정확하게 있는 것 같고, 그중에 후자가 나는 참 마음에 든다. (18일) 수많은 상징과 은유로 석양처럼 붉고 어둡게 빛나는 칠레의 밤. 처음 볼 때 147쪽의 "습관은 모든 조심스러움을 무디게 하고 일상은 모든 끔찍함을 누그러뜨리는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문장에 밑줄을 그었다. 그땐 몰랐는데, 다시 보니 너무 무서운 의미를 담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식으로 놓친 게 한두 개가 아닐 거야. 나는 시를 좀 봐야 해. <신곡>도 좀 제대로 봐야...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