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쿳시 형님이 말하길...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타이핑하는 것은 매일매일 써 가는 의견들이어서 잡문에 속해요. 잡문은 시작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소설과는 달라요. 그것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나도 몰라요. 독일인들의 원하면 계속되는 거죠."

 "이런 걸 왜 써요? 다른 소설을 써 보면 어때요? 당신이 잘하는 건 소설 아닌가요?"

 "소설이라고요? 아니오, 내게는 더 이상의 인내심이 없어요. 소설을 쓰려면 아틀라스 신 같아야 해요. 일이 진행되는 동안 온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견뎌야 하는 아틀라스 신 같아야 한다고요. 지금의 나로서는 너무 무리예요."

 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 모두한테는 의견이 있잖아요. 특히 정치에 관해서는 말이죠. 당신이 이야기를 하면 적어도 사람들은 입을 닫고 당신 말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이야기든 농담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그가 말했다. "이야기는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지, 얘기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일생 동안 이야기를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알아요. 자신을 강요하려 하면 안 돼요. 이야기가 스스로 얘기하도록 기다려야죠. 기다리면서 그것이 귀먹고 말 못하고 눈먼 상태로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거죠. (...)"  //  (65-67p, 강조는 인용자)


 예술의 편을 들어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모든 예술가들이 최선의 것을 위해 노력하는 한, 예술의 영역을 경쟁적인 정글로 돌리려는 노력들은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비지니스는 예술 분야의 경쟁에 투자하기를 좋아한다. 경쟁적인 스포츠에 돈을 퍼붓는 덴 더 열심이다. 하지만 운동선수들과 달리 예술가들은 경쟁이라는 것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고 선전을 위한 곁다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술가들의 눈은 결국 경쟁이 아니라 진실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  (135,136p, 강조는 인용자)


 사랑. 가슴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  //  (194p)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감을) 은총의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속삭임도 아니다. 그것은 끈기와 장악을 통해서 당신이 주제와 일체(一體)가 되는 순간이다. …… 그 주제를 몰아치고, 그 주제도 당신을 몰아친다. ……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꿈도 꾸지 않았던 것들이 당신에게 일어난다.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주: The Fragrance of Guava, trans. Ann Wright (London: Verso, 1983), p.34.)  //  (212p, 강주는 인용자)


// J.M. 쿳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왕은철 역, 민음사


이쯤에서 빠질 수 없는 쿳시 형님의 얼굴!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스카 와오, 찰스 부코우스키


 주노 디아스가 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제목에 들어 있는 것처럼 '놀라운' 소설은 아니었다. 아직 내가 넘어서지 못한 어떤 한계가 이 소설을 만끽하는 데 방해가 된 것 같다. 퓰리처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그 주변부에 쏟아진 찬사들 때문에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400페이지 남짓한 이 소설에서, 그러나 나를 단숨에 멍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 "마지막 편지"라는, 정확히 소설의 마지막 세 페이지. 소설에서 결말이 얼마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하고 또 중요한지를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보면 된다. 물론 마지막만 읽어선 알 수 없는 노릇. 한 2년 내로 영어 실력을 키워 원서로 꼭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번역이 좋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고.)


 며칠 전에 자주 들르는 헌책방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단편집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 그 첫번째>를 발견했다. 찰스 부코우스키라면 작년에 <팩토텀>이라는 소설을 접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작가였다. 그렇게 만족스러웠던 건 아닌데 단편집에 괜히 더 눈길이 간 이유는 며칠 전 만난 20대 초반의 알있따운 아가씨가 그 단편집이 너무 좋다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나서. 그리고 구입.
 
 책 속 "역자 후기"에 따르면 원서를 둘로 나누어 번역 출간할 예정이라고 되어 있으나 아마도 판매 상황상 두 번째 책을 내는 건 무리였나보다. 아무려나 조금 기대를 한 채 읽기 시작했고 보았고, 우와앗! 이 소설 역시 "회"라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다섯 번째 위치하고 있는 단편 "기력조정기"라는 소설을 보고 책을 덮은 후 새로 쓸 소설을 열심히 구상해보았다. 노트에 아이디어를 끼적대면서. 하여간 소설을 쓰게 만드는 소설들이 있다. 샐린저도 그렇고, 하진도 그렇고, 오츠이치도 그렇고, 부코우스키도 그렇고. 하진은 좀 웰메이드에 가까운 소설이지만 다른 소설들은 나에게 "회". 하핫.

이쯤에서 부코우스키 형님




2009년 11월 9일 월요일

테드 창은 예외

 
 며칠 전 소설가의 미덕이라며 과작하는(과자먹는?) 작가는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예외가 있다. 어차피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테드 창이 바로 그 예외의 주인공이다.

 1990년 "바빌론의 탑"이라는 단편을 발표한 이후 2002년 <당신 인생의 이야기>(한국엔 2004년에 번역 출간)라는 책이 출간되기까지 고작 8편의 중단편밖에는 발표하지 않았다. 1년에 채 한 편도 되지 않는, 무지하게 과작의 작가. 하지만 나는 테드 창을 사랑하고 테드 창의 작품을 사랑한다.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의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작 8편의 길지 않은 작품으로 책 앞표지에 홍보해둔 것처럼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사이드와이즈상, 존 캠밸 Jr. 기념상을 수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소설을 통해서 SF의 정수를 볼 수 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의 소설이 단편의 미학을 제대로 담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단 하나의 이유.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소설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으로부터 결국 '경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든, 독자로부터 경탄을 이끌어내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과작의 작가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테드 창만은 정말 예외의 작가다.


테드 창 님 쫌 동안인 듯!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마이조 오타로 소설들


 지금까지 읽은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들을 마음에 들었던 순서대로 나열해본다.

1. <아수라 걸>
2.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
3. "우리집의 토토로"
4. "모두 씩씩해"
5. <연기, 흙 혹은 먹이>
6. "메쿠로메쿠"
7. "소말리아, 서치 어 스위트 하트"
8. "스쿨 어택 신드롬"
9. "데드 포 굿"
10. "화살을 멈추는 다섯 마리의 부리 없는 새"

 마이조 오타로 스타일이 묻어나는 단편은 확실히 별로다. 단편보다는 중편이나 장편에서 오타로의 스타일이 잘 사는 것 같다. 어제 그제 봤음에도 8번이나 9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열 편의 소설 중 가장 非오타로스러운 소설은 3번이다. 굳이 거칠게 비유를 하자면, 다른 소설은 (데스)메탈인데 반해 3번은 경쾌한 댄스락 정도의 느낌이랄까. 제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3번을 읽고나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가 보고 싶어 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