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0일 일요일
12월 15일 ~ 12월 21일
1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_[091206] (3)
2위. 김사과, <미나>_[091216] (1)
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_[091214](2)
4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_[091209] (2)
5위. 천명관, <고래>_[091203] (2)
6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_[091208] (2)
7위.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_[091221] (2)
미나를 읽고, 다시금, 새삼, "소설의 윤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1위에 올릴까도 고민했으나 우선 2위에 랭크.
2003년 이맘때쯤 읽고 6년만에 다시 읽었다.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의 번역이라 조금 기대도 했다. 그러나 6년 동안 나는 달라진 게 없는 걸까. 이 소설을 향한 그 많은 열광과 상찬들이 내게는 여전히 이물질처럼 느껴진다. 대충은 알 것도 같지만, 정말 내 취향과는 거리가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무엇보다 이런 방식의 문장들, 그러니까 문장 사이의 밀도보다는 그 문장 자체의 밀도에 더욱 심혈을 기울인 소설들은 읽기가 너무 버겁다. 한 문장을 읽고 나면 그 뒤를 이어 그 다음 문장이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라 내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떠오르니까. 한 시간에 30페이지도 채 못 읽는 것 같다. 조만간 김욱동 번역으로 다시 읽어봐야겠다.
포어의 소설이 3주째 1위 자리를 굳건히 차지하고 있다.
2009년 12월 16일 수요일
미나를 읽고
소설에 대한 내 취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
정말.
정말.
내가 쓰는 소설이 얼마나 안일하고 태평한지 깨달았다.
요즘, 소설을 읽으면서 자주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일단 읽기 시작한 소설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끝까지 읽기.
이 소설 역시 끝까지 읽어야 한다.
중2병 캐릭터에 작가자의식 과잉이라 섣불리 오해하고 덮어서는 안 될 일.
(사실 내가 그런 유혹에 많이 휩쓸렸기 때문;;)
발터 벤야민의 멋진 멘트를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
이 책이, 이 소설이 정확하게 그러하다.
우리나라에 이런 소설이 있어서...
뭔가 남몰래 씨익 쪼개고 싶은 느낌이다.
몇십분후
돌이켜보면, 사실 돌이켜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나는 10대 시절 세 가지에 반항(혹은 저항)했다. 첫 번째가 종교였고, 두 번째가 학교였으며, 세 번째가 부모님이었다. 자세한 얘기를 쓰려니 길어질 것 같고... 이 모든 것들이 정확히 1년만 일찍 시작됐다면 어떻게 됐을지 궁금하다. 흠. 크게 달라질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미나>는 참 리얼한 작품이다.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는 그런 '리얼'이 아니라, 우리가 쉽게 볼 수 없는 무언가(이를테면 본질?)를 리얼하게 그리려고 애썼다는 점에서 리얼한 작품이라는 얘기다.
책 보는 중에 부산의 친구님과 전화통화를 했다. 전화받자마자 대뜸 자신이 편집하고 있는 책의 작가에 대한 분노부터 표출하더니 자연스레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에 대한 얘기로 이동 ㅡ 그 속에 담긴 내용 ㅡ 세잔의 사과에 대해서 ㅡ 세잔이 사과를 많이 그렸는데 그건 사과의 본질 자체를 파악하고자 해서 ㅡ 어차피 사과의 본질은 인간이 파악할 수 없다 ㅡ 하지만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ㅡ 뭐 이런... 작가 이름이 김사과라니... 라는 생각에까지 도달.
2009년 12월 13일 일요일
12월 8일 ~ 12월 14일
1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_[091206] (3)
2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 야구>_[091214](2)
3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존 레논과 화성인>_[091209] (2)
4위. 천명관, <고래>_[091203] (2)
5위.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_[091208] (2)
+ 제목 뒤 괄호( ) 안의 숫자는 지금까지 읽은 횟수.
세 편을 연속해서 보니 내가 왜 겐이치로의 소설을 좋아하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위에 랭크된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들은, 이를테면 나에게 "디스크 조각 모음" 같은 작품들이었다.
이야기도 없(는 것 같)고, 주제도 없(는 듯하)지만, 읽고 나면 정확히 겐이치로 식의 '테마' 하나만은 분명히 남는다. (문체도 조금...)
사실 2위부터 5위까지는 별 차이가 없다.
2009년 12월 11일 금요일
문학동네판 세계문학 시리즈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 시리즈가 대거 출간되었다. 총 열세 종 열일곱 권이다. 아직 정확한 시리즈 명이 뭔지는 모르겠다. 온라인 서점에서 확인했는데 자세한 소개글은 아직 안 올라왔다. 대형서점에 가서 확인해... (입고가 됐으려나?)
아무튼 총 열세 종의 작품 중에 가장 관심 있는 작품은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절판된 도서 중 재출간되기를 손꼽았던 작품 중 하나다. <가면의 고백>도 재출간된 김에 오랜만에 미시마 유키오 읽기를 한번 해보...ㄹ지 어떨지는 모르겠고. 그리고 또 관심 있는 작품은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과 특별봉사대>. 어쩐지 얼마 전에 문학동네에서 <나는 훌리오 아주머니와 결혼했다>가 재출간된다 했다. 근데 요사 책은 새물결 출판사에서 더 많이 나왔는데... 흠 조만간 바르가스 요사 읽기는 꼭 해야지. 책도 차곡차곡 모아가고 있...
한국에서 누렸던 많은 것을 버리고 미국으로 훌쩍 떠난 소설가 김영하도 이번 시리즈에 번역자로 참여한 것 같다.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 (김영하는 정말 한국의 하루키가 되고 싶은 건가?) 영어로 소설 쓰고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번역하고 있었구나. 조만간 문학동네에서 신간이 나올 것도 같은데... <검은 꽃> 이후 출간된 두 편의 소설을 통해 점차적으로 실망하기는 했어도 김영하는 여전히 신간이 기다려지는 작가구나, 싶네. 왠지. 뭐랄까. 흠, 그런가.
그밖에, 오랫동안 거의 유일한 번역본이랄 수 있었던 범우사판의 <안나 카레리나>, 첫 출간 이후 잦은 오역 및 오타로 물의를 일으켜 결국 전권 회수 후 개정작업에 들어간 작가정신판 <안나 카레리나>, 뒷표지에 당당히 오타를 내 나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민음사판 <안나 카레리나>에 이어 이번 문학동네판 세계문학 시리즈에도 <안나 카레라니>가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달까. 어쩐지 쫌... 위대한 작품 같다는 기분이...
2009년 12월 10일 목요일
The YRs PRIZE in Novel 2009 Shortlist
음. 그래도 써둔 건데... 하는 생각으로 뒤늦게 공개하는 "The YRs PRIZE in Novel 2009 Shorlist" (올해가 마지막이 되려나.txt) 어쨌거나 올해 초부터 11월 30일까지 읽은 소설 중 마음에 들었던 작품 목록.
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4)
ㅡ 스물일곱에서 스물아홉까지 총 3년 동안 내게 가장 빛났던 소설을 딱 한 권만 꼽으라면 조금 고민해본 뒤 아마도 이 작품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이십대를 한달 앞둔 시점에 이 소설을 읽으며, 이제 이 소설이 내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기란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건 어쩌면 내가 더이상 이십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아 기분이 참 묘했다.
나카가미 겐지, <고목탄> (2)
ㅡ 2007년 초에 처음 보고 두 번째 본 소설이다. 고진의 책들을 읽으며 함께 본 작품이다. 주제나 구성, 소설, 분위기 등 전반적으로 내 취향에 안 맞는 것들 투성이지만, 그런 내 편협하나 취향 따위 가뿐히 즈려밟아주시는 소설이다. 뭔가 '근대문학' 내지는 '정점' 등의 개념들이 드문드문 떠오르는 소설이랄까.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
ㅡ 작가의 의도에 의하면 이 소설은 미완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충분히 완성적이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인데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어. 매년 한 번씩, 은 좀 힘들겠고 가능하다면 2년에 한 번씩 정도 반복해서 보고 싶은 작품이다.
마이조 오타로, <아수라 걸> (1)
ㅡ 이 소설을 후보에 올리는 데 주저함이 있었다면, 그건 순전히 새로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역사(적 사건)속에서의 개인이 아닌, 순수하게 판타지 속에서의 개인에 대한 탐구가 대단히 독특하고 환상적인 방식으로 잘 이루어진 작품이다. 나는 이 소설에서 드러나는 것과 같은 방식의 구성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이보) 안드리치, <드리나 강의 다리> (1)
ㅡ 여기 또, 내 취향과는 조금 무관한 소설이 후보에 오르고 말았다. 안 올릴 수가 없는 작품이니까.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보지 않았다면 이 소설의 매력을 느끼기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드리나 강의 다리 위에서 드리나 강을 내려다보고 있으면 이 소설이 떠오를까. 아니, 어쩌면 이 소설을 보고만 있어도...
(Ha) Jin, <The Bridegroom> (1~3)
ㅡ 모르는 단어가 적지 않았지만 영어 구문이 그리 어려운 편이 아니라 원서로 읽어도 꽤 만족스러웠던 하진의 단편집. 작년인가 재작년에 샀는데, 그후 이번까지 두세 번 본 단편도 있고 처음 본 단편도 있다. 웰메이드 작품이라고 전부 문학적인 것도 아니고, 반대로 웰메이드가 아니라고 문학적이지 않다라고 할 수도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집에 있는 단편은 대부분 웰메이드면서 문학적이다. (웰메이드라는 건 뭐고 문학적이라는 건 또 뭔가효.hwp)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 (2)
ㅡ 인간은 도대체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인가. 이 단편집의 몇몇 단편들을 보며 떠오를 수밖에 없는 의문이었다. 예전에 볼 때도 굉장히 만족하며 본 단편집이지만, 올 여름, 테드 창의 한국 방문(및 강연회)를 기념하여 다시 봤을 때도 여전히 멋진 단편이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었다.
(J.M.) 쿳시, <야만인을 기다리며> (1)
ㅡ 쿳시의 소설은 아무리 실망스러워도 다섯 개 만점의 별점에서 최소한 네 개 정도는 찍어준다. 말하자면, 실망스럽다는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얘기. 언제나 의심없이 믿고 읽을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작가. 장점이 많지만, 특히 이 작품에서는 이곳저곳에 스며들어 있는 유머가 참 매력적이었다. 멋진 작품, 멋진 번역으로 한국에 소개해주신 왕은철 선생께 감사.
+ 제목 옆 괄호 안의 숫자는 지금껏 읽어본 횟수
2009년 12월 8일 화요일
눅눅한, 좀도둑
"오늘은, 여러분."
나는 말했다.
"하나만 여쭤보고 싶습니다만, 혹시 강도짓을 하실 생각이라면 이곳은 돈이 될 만한 물건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당연하지. 이런 눅눅한 곳에 강도짓 하러 들어오는 바보가 어딨겠어?"
<꼬마 갱>은 말했다.
"잘 알겠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분필을 잡았다.
"잠깐만 기다려."
<꼬마 갱>은 기관총으로 내 심장을 겨누었다.
"그건 뭐야?"
"분필입니다."
"무엇을 할 생각이지?"
"수업을 할 겁니다."
"분필로?"
"예."
"분필을 줘봐. 던지지 마! 손으로 건네. 그다음에는 두 손을 머리 위에 얹어."
<꼬마 갱>은 분필을 받아서 가볍게 흔들더니 둘로 꺾었다.
"속에도 분필인가?"
"예."
"이걸로 무얼 하지?"
"수업을 합니다."
"수업이 뭐야?"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렵습니다."
"우리에게 거짓말을 했군."
"아뇨."
"그럼 수업이란 게 뭐야?"
"진리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겁니다."
"그저 생각하는 것뿐이야?"
"진지하게 생각합니다."
"생각해서 어떻게 되는데?"
"별로 쓸모는 없을 겁니다."
"별로 쓸모도 없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수업이란 말이지?"
"뭐, 그렇습니다."
"너, 그것을 하는 게 직업이야?"
"예."
"웃기는 녀석이군. 너 같은 녀석을 건달이라고 불러."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생각한다고 그랬지?"
"진리입니다."
"설명해 봐."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목숨이 아깝지 않아? 나를 놀리지 마."
"<꼬마 갱>은 앉은 채로 기관총 방아쇠에 작은 검지를 올려놓았다.
"시의 진리입니다. 여기서 제가 다루고 있는 것은."
"처음부터 그렇게 정직하게 말했으면 좋잖아. 그건 어떤 거야?"
"저도 잘 모릅니다."
"넌 자기도 잘 모르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게다가 생각해 봤자 별로 쓸모도 없다고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그래서 돈을 받고?"
"그렇습니다."
"너 같은 놈을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좀도둑이라고 불러. 우리는 그런 짓 안 해."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어쨌든 좋아. 그런데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거지?"
"별로, 아무것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게 뭐로 보여?"
"기관총입니다."
"내가 방아쇠를 당기면 어떻게 되지?"
"총알이 나갑니다."
"맞으면 아프지. 알아?"
"예."
"다시 한 번 묻겠다. 준비됐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줄 거지?"
"시를 쓰는 방법입니다."
"어디에 쓸모가 있지?"
"실용적이지는 못할 겁니다."
"전혀 쓸모가 없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목숨이 아까우면 제대로 가르쳐봐. 알아들었어?"
"예."
"시작해!"
// 225-228p, 다카하시 겐이치로, <사요나라 갱들이여>, 이승진 옮김
2009년 12월 6일 일요일
12월 1일 ~ 12월 7일
"The YRs PRIZE in Novel 2009 Shortlist"를 준비하다가, 준비하다가,
1년 동안 봤던 소설들을 한꺼번에 판단하기란 참으로 곤란하다는 걸 새삼 깨닫고는...
한달 전에 읽은 소설과 반년 전에 읽은 소설을 동등하게 비교하기도 힘들고,
한 번 읽은 소설과 세 번 읽은 소설을 같은 시선으로 보는 것도 힘들고,
(그래서 결국 시상식 전격 취소... 랄까;;)
대신
"YRs Favorite Novel List"를 만들기로 했다.
12월 1일부터 읽은 소설을 대상으로 하여 일주일에 한 번씩(이 될지 이주일에 한 번씩이 될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지만 어쨌거나) 순위 작성.
우선, 1위부터 30위까지 리스트를 만드는 게 목표.
차후에 50위까지 늘어날지 어떨지도 모르겠고, 그때까지 이걸 계속 할지도 모르겠고.
소설에 순위를 매기는 것도 좀 웃기는 노릇이긴 하지만...
1위.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_[091206] (3)
2위. 천명관, <고래>_[091203] (2)
+ 제목 뒤 괄호( ) 안의 숫자는 지금까지 총 읽은 횟수.
2009년 12월 5일 토요일
모르겠다니까
믿을 수 없을 만큼 외로운
아무 소리도 없다.
나는 침대에서 나와 문으로 갔다.
"그 말 취소할게요."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엄마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엄마가 반대편 손잡이를 잡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문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취소한다고."
"그런 말을 취소할 수는 없어."
아무 대답도 없다.
"제 사과를 받아주실 건가요?"
"모르겠다."
"모르신다니 말이 돼요?"
"오스카, 모르겠다니까."
"저한테 화나셨어요?"
아무 말도 없다.
"엄마?"
"응."
"아직도 저한테 화나셨어요?"
"아니."
"정말요?"
"너한테 화난 적은 없단다."
"그럼 어땠는데요?"
"마음이 아팠어."
// (236-237p, 조너선 사프란 포어,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 송은주 역)
교수대 위의 까치
<교수대 위의 까치>는 진중권의 책 제목이다. 까먹지 않기 위해서 굳이 이렇게.
아직 읽은 건 아니고.
얼마 전 책 관련 티비 프로그램에서 장정일이 추천한 책이 바로 <교수대 위의 까치>다.
추천의 변은... 기억이 잘 안 난다. 변들이 다들 그렇듯 변기 속에 퐁당.
우석훈은 자신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시사인에서 올해의 책을 선정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올해의 책이 아니라 지난 5년간의 책을 고르라고 해도, 당연히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라고 할 수 있다."
<교수대 위의 까치>를 추천하는 사람이 앞으로 한 명만 더 눈에 띄기만 해봐라.
사봐야지 뭐.
"소설통신"이라는 카테고리로 분류해뒀지만, 소설 아님.
2009년 12월 4일 금요일
사요나라 갱들이여 찾기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데뷔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제1회 미시마유키오상을 수상한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가 더 알려지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사요나라 갱들이여>를 훨씬 더 괜찮게 봤다.
어제는 모 학교에서 면접을 봤는데, 내가 써서 낸 소설도 헷갈려서 헛소리를 해댔고, 어쨌거나 총체적인 헛소리의 잡탕이라 면접을 볼 때면 주로 그렇듯 면접관들을 코믹 대폭소의 도가니로... 만든 것 정도는 아니지만, 즐겁고 유쾌했던 부분만 기억나고... (내 속에 잠재해 있다가 긴장상태에 돌입하면 튀어나오는 개그 본능이랄까;;) 면접이 끝난 후에야 내가 해댄 헛소리 때문에 극심한 좌절감에 휩싸였... (줼읠)
암튼 그 학교에 재학중인 사람들 둘과 점심을 먹고 여기저기 싸돌아다니고 저녁을 먹은 후 집에 와서... 영화과에 재학중인 한 분이 알려준, 단편영화들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사이트인 youefo.com에 가서 대단히 좋아하는 윤성호 감독의 예전 작품과 나홍진의 단편들을 보았다. 둘 감독의 단편들에선, 최근 장편에서 보여지는 그들의 색깔을 원석처럼 찾아낼 수 있었다.
제목은 저렇게 해두고 자꾸 딴 소리를 하고 있는데, 어제 잠들기 전부터 오전에 일어나서까지 뜬금없이 자꾸만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이 미친 듯이 보고 싶어 우선 요새 이런 저런 불매운동으로 뭔가 이상한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ㅇㄹㄷ 서점 내 중고샵에서 <야구>와 <겐이치로>를 구입했고... 겐이치로의 작품들은 예전에 다 도서관에서 봤기 때문에 소장한 책은 한 권도 없다. 얼마 전에 우연히 발견한 <존 레논과 화성인>만 있을 뿐.
암튼 <사요나라 갱들이여>는 모든 온라인 서점에서 절판 상태. 내가 검색해본 한 20여개 온라인 헌책방에서도 재고 없음. 그래서 근방의 대형서점에 일일이 전화해가며 재고여부를 확인했으나 재고 없음. 서울 내 교보문고 오프라인 지점 검색 시스템에서 검색해도 전부 품절 상태. 겨우겨우 ㅂㄷㅇㄹㄴㅅ 종로점에서 한 권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 젠장 도대체 몇 시간이 걸린 거냐;;
예약을 해두었으니 이거 쓰고 얼른 가서 사야겠다.
2009년 12월 2일 수요일
고래, 붉은 벽돌의 여왕
2005년경에 처음 읽은 이 소설을 4년여 만에 다시 읽으며 가장 많이 했던 고민은 이 소설을 계속 읽어야 하느냐 마느냐 하는 점이었다. 지금껏 계속 좋다고 생각해온 소설이, 막상 다시 읽어보니 기대치에 못 미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끝까지 읽었던 이유는, 이번이 <고래>의 마지막 독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읽다 만 소설에 대해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어쨌거나 이 소설은 잘 읽히는 편이고, 결론적으로 끝까지 읽어내길 잘 했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에서 결말의 비중이 얼마나 큰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나를 매혹시킨 구절은 다음과 같다. 어차피 이 부분만 읽어선 도대체 이게 뭐가 그리 매혹적인지 알 수 없겠지만 읽어본 사람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건 마치 베이징 올림픽 당시 일본과의 야구 준결승 경기에서 이승엽이 8회초에 날린 홈런과도 같은 것이다. 그때까지의 올림픽 야구 과정을 알지 못한다면 이승엽의 그 홈런이 얼마만큼 감동적인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어쨌거나, 인용구절.
그리고…… 그는 보았다! 공장 뒤편, 드넓은 벌판에 가득히 쌓여 있는 붉은 벽돌을!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가슴은 쿵쾅거리며 뛰어대고 입에선 비명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오랜 세월 잡초에 묻혀 있던 벽돌이 마침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건축가는 다리에 힘이 풀려 가마를 손으로 집은 채 눈앞에 펼쳐져 있는 벽돌을 바라보았다. 벽돌은 너른 벌판을 모두 뒤덮고도 모자라 멀리 계곡 아래에까지 쌓여 있었다. 한눈에 봐도 그 양이 엄청나, 대극장을 여러 개 짓고도 충분히 남을 정도였다. 그 모든 게 한 인간이 이룩한 것으로 치자면 참으로 놀랍고도 감동적인 결과물이었다. 전날, 요원들이 입구에까지 와서도 벽돌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한 길이 넘게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잡초와 공장 마당에 길게 늘어선 가마들 때문이었다. 수십만 장, 아니 수백만 장의 벽돌들은 제각기 생명을 가진 듯 저녁노을 아래 거대한 파도처럼 꿈틀거렸다. 벽돌을 바라보고 있던 건축가는 숭고한 감동에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리고 곧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렸다.
ㅡ 이건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기적이야!
때마침 벌판 너머 서쪽 하늘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벽돌은 노을빛과 어우러져 거대한 들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참으로 장엄한 광경이었다. (402p)
아닌 게 아니라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기적이었고 또한 들불처럼 활활 타오를 것만 같은 장엄한 광경이었다. 동시에, 읽으면 1분도 채 걸리지 않을 분량의 이 구절에서, 나는 국밥집 노파에서부터 시작하여, 금복, 걱정, 칼자국, 쌍둥이 자매, 코끼리, 文 등의 이야기가 찰라의 이미지로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벽돌이 쌓여 있는 광경만 그려진 게 아니라 소설에 나왔던 많은 장면들이 아주 빠르게,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려진 것이었다. 정말 진심으로, 끝까지 읽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을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소설은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었다. 물론 디아스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떠오른 소설 역시 <고래>였다. 소설들에서 나타나는 몇 가지 (어쩌면 사소하고 어쩌면 중요한) 공통점 때문에 이 두 소설이 내게는 짝패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떠오르는 제목의 문제.
기억하기로 <고래>의 원래 제목은 "고래"가 아니었다. 어떤 이유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소설 관계자들은 "고래"라는 제목이 이 소설을 담아내기에 여러 모로 적합하다고 여긴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며, 소설의 원래의 제목이 훨씬 더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예전 제목 역시 정확하게 기억하기는 힘들지만, 소설 속의 한 구절을 보며 그것이 이 소설의 원래 제목이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붉은 벽돌의 여왕"이었다. 물론 분량상으로 봤을 때 이 소설은 붉은 벽돌의 여왕, 즉 춘희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 주변부, 특히 그(녀)의 모친이었던 금복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인 측면으로 접근할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소설 말미에서 "붉은 벽돌의 여왕"을 접한 순간 이 소설이 결국 춘희, 즉 붉은 벽돌의 여왕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그건 마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 단순히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 대한 내용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마침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이라는 것처럼.
마지막으로, 이 소설은 화자(혹은 작가)의 입담과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만 가지고도 소설이 충분히 매혹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고래>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비록 책 말미의 심사평이나 수상작가 인터뷰에서 드러나는 문창과 교수, 소설가, 문학평론가들의 호들갑스러운 상찬은 눈엣가시지만...
간밤에 내가 깔깔댄 이유는...
// 여기저기서 거침없이 죽이자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물론, 일꾼들을 부추기고 충동질해서 그곳까지 끌고 온 자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의 말엔 아무런 근거도 없었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은 그 어떤 백 마디 말보다도 힘이 있었고 그 어떤 논리보다도 설득력이 있었으며 그 어떤 선전문구보다도 자극적이었다. 그것은 구호의 법칙이었다. 재청에 뒤이어 봇물이 터지듯 여기저기서 온갖 종류의 구호들이 쏟아져나왔다.
(* 이제부터 웃기다.)
이날 쏟아진 구호들 가운데, '벽돌을 못 쓰게 죄다 깨뜨려버립시다!'나, '가마를 부숴버립시다!' 혹은 '공장에 불을 질러버립시다!'와 같은 주장은 잔뜩 화가 난 일꾼들 사이에서 일견 나올 법한 얘기였지만 어디선가 튀어나온 '파쇼에게 죽음을! 노동자에게 생존권을!'이나 '재벌독재 타도하여 노동자 천국 이룩하자!'와 같은 구호는 산골짜기에 있는 벽돌공장에서 써먹기엔 다소 유난스런 감이 없지 않았으며,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만세!'나 '수령님의 영도 따라 미제를 박살내자!'와 같은 구호는 다소 수상한 감이 없지 않은데다, '아름다운 금수강산에 벽돌공장이 웬 말이냐!'나 '생태계를 파괴하는 개발독재 물러가라!'와 같은 구호는 다소 때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데, 또 어디선가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숙아, 사랑해!'나 '씹할, 그때 홍싸리를 먹는건데'와 같은 소리는 그야말로 구호도 아니고 뭣도 아닌, 분위기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자들이 내지른 잡소리에 불과했다 아니할 수 없다. // (205-206p)
// 큰 물고기가 산속에 떨어지면 불기둥이 치솟아 하늘에 닿고
남쪽에서 오노 사내가 술에 취하면 너희의 자손은 검불처럼 쓰러지리라.
(...)
그날의 사태는 금복이 대충 집 안팎에 고수레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사람들의 호기심은 당장에 무당의 입에서 흘러나온 큰 물고기란 게 과연 무엇이냐, 그리고 재앙을 불러온다는 사내가 과연 누구냐 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이에 대한 온갖 추측과 견해, 짐작과 해석, 주장과 설이 난무했다. 이른바 그 유명한 공수논쟁의 시작이었다. 그 논쟁에는 당시 평대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모두 뛰어들어 서로 편을 갈라 물고 뜯고 할퀴다, 대개의 논쟁이 그렇듯이 결국 서로간에 깊은 상처만을 남기고 말았는데, 이에 대해 대강 살펴보는 것도 전혀 의미가 없지는 않을 듯싶다.
(...) 이이 대해, 두 구절이 모두 각기 다른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가정법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실은 하나의 사건을 다르게 표현한, 즉 단일한 사건에 대한 예언이란 설과, 두 개의 문장이니 당연히 독립된 두 개의 사건으로 봐야 한다는 견해가 팽팽히 맞섰다. 이에 따라 하나의 사건으로 보는 일사학파(一事學派)와 두 개의 독립된 사건으로 보는 이사학파(二事學派)로 나뉘어 한동안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들은 '산속'이 평대를 가리키고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같이했지만 산속에 떨어진다는 '큰 물고기'의 해석을 두고 다시 의견이 엇갈렸다. 일사학파는 불기둥이 치솟아 하늘에 닿는다는 따져볼 것 없이 남성의 발기된 성기를 가리키며, 이로 미루어 큰 물고기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한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따라서 노파의 공수는 저주가 아니라 생전의 노파를 사로잡았던 반편이의 거대한 성기를 찬양하는 동시에, 남녀간의 운우지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이사학파에선 불기둥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모든 범주에 기계적으로 무리하게 적용함으로써 해석상의 전반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큰 물고기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것은 지난 전쟁에서 등장한 신무기, 즉 미사일을 가리킨다는 거였다. 미사일이 마치 물고기처럼 유선형으로 생긴데다 뒤에 나오는 불기둥이란 말과 정확하게 호응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이제부터 웃기다.)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쌔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섁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갔다. // (240-243p)
// 언젠가 한 정치가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는 평대에서 공산주의자를 완전히 몰아내야 된다며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금복은 파이프를 물고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 정치가의 말을 듣고 있다 문득 생각이 난 듯 물었다.
ㅡ 그런데 그 공산주의라는 게 대체 무엇에 쓰는 물건이죠?
그러자 정치가가 대답했다.
ㅡ 그것은 물건이 아니라 생각의 이름이죠.
ㅡ 생각에도 이름이 있나요?
ㅡ 당연히 있죠. 세상에 이름이 없는 건 없어요. 사회주의, 자본주의, 민주주의, 실용주의,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낭만주의, 실존주의, 표현주의, 물신주의, 개인주의, 사실주의 초현실주의, 배금주의, 물질만능주의, 한탕주의, 맹견주의…… // (261p) 빵 터짐... 풉
이건 모두, 천명관이 쓰고 문학동네에서 출간된 <고래>에서 나오는 내용.
올해의 책
올해의 책을 딱 한 권만 고르자면, 별로 주저하지 않고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꼽겠다. 올해 가장 많이 읽은 책이기도 하고, 열심히 읽은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도 같다. 민음사에서 97년에 처음 번역 출간된 이 책을, 나는 2009년 8쇄로 처음 읽었다. 그리고 아마도 8쇄가 마지막이지 싶다. 판권이 가라타니 고전 전문(?) 출판사인 "도서출판 b"로 넘어갔으니까. 역자는 바뀌지 않는 걸로 알고 있지만, 아마도 각주가 잔뜩 채 새로운 버전이 나올 듯. 새로 나오면 비교해가면서 다시 봐야지.
어쨌거나 나에게 올해의 책은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임.
현재는 "The YRs PRIZE in Novel 2009 Shortlist" 작성중...
2009년 11월 25일 수요일
쿳시 형님이 말하길...
그가 대답했다. "당신이 타이핑하는 것은 매일매일 써 가는 의견들이어서 잡문에 속해요. 잡문은 시작과 중간과 결말이 있는 소설과는 달라요. 그것이 얼마나 길어질지는 나도 몰라요. 독일인들의 원하면 계속되는 거죠."
"이런 걸 왜 써요? 다른 소설을 써 보면 어때요? 당신이 잘하는 건 소설 아닌가요?"
"소설이라고요? 아니오, 내게는 더 이상의 인내심이 없어요. 소설을 쓰려면 아틀라스 신 같아야 해요. 일이 진행되는 동안 온 세상을 어깨에 짊어지고 몇 달이고 몇 년이고 견뎌야 하는 아틀라스 신 같아야 한다고요. 지금의 나로서는 너무 무리예요."
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 모두한테는 의견이 있잖아요. 특히 정치에 관해서는 말이죠. 당신이 이야기를 하면 적어도 사람들은 입을 닫고 당신 말에 귀를 기울일 거예요. 이야기든 농담이든 상관없이 말이죠."
그가 말했다. "이야기는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지, 얘기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는 일생 동안 이야기를 갖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 정도는 알아요. 자신을 강요하려 하면 안 돼요. 이야기가 스스로 얘기하도록 기다려야죠. 기다리면서 그것이 귀먹고 말 못하고 눈먼 상태로 태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거죠. (...)" // (65-67p, 강조는 인용자)
예술의 편을 들어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모든 예술가들이 최선의 것을 위해 노력하는 한, 예술의 영역을 경쟁적인 정글로 돌리려는 노력들은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했다고 말이다. 비지니스는 예술 분야의 경쟁에 투자하기를 좋아한다. 경쟁적인 스포츠에 돈을 퍼붓는 덴 더 열심이다. 하지만 운동선수들과 달리 예술가들은 경쟁이라는 것이 실체적인 것이 아니고 선전을 위한 곁다리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예술가들의 눈은 결국 경쟁이 아니라 진실한 것,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 (135,136p, 강조는 인용자)
사랑. 가슴이 간절히 염원하는 것. // (194p)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감을) 은총의 상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늘에서 내려온 속삭임도 아니다. 그것은 끈기와 장악을 통해서 당신이 주제와 일체(一體)가 되는 순간이다. …… 그 주제를 몰아치고, 그 주제도 당신을 몰아친다. …… 모든 장애물이 사라지고, 꿈도 꾸지 않았던 것들이 당신에게 일어난다. 그 순간에는 이 세상에서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주: The Fragrance of Guava, trans. Ann Wright (London: Verso, 1983), p.34.) // (212p, 강주는 인용자)
// J.M. 쿳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왕은철 역, 민음사
이쯤에서 빠질 수 없는 쿳시 형님의 얼굴!

근데 제목을 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라고 붙였을까.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오스카 와오, 찰스 부코우스키
주노 디아스가 쓴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은 제목에 들어 있는 것처럼 '놀라운' 소설은 아니었다. 아직 내가 넘어서지 못한 어떤 한계가 이 소설을 만끽하는 데 방해가 된 것 같다. 퓰리처 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 그리고 그 주변부에 쏟아진 찬사들 때문에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400페이지 남짓한 이 소설에서, 그러나 나를 단숨에 멍하게 만든 부분이 있다. "마지막 편지"라는, 정확히 소설의 마지막 세 페이지. 소설에서 결말이 얼마만큼 중요하고 또 중요하고 또 중요한지를 알고 싶다면 이 소설을 보면 된다. 물론 마지막만 읽어선 알 수 없는 노릇. 한 2년 내로 영어 실력을 키워 원서로 꼭 다시 한번 보고 싶다. (번역이 좋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고.)
며칠 전에 자주 들르는 헌책방에서 찰스 부코우스키의 단편집 <일상의 광기에 대한 이야기 - 그 첫번째>를 발견했다. 찰스 부코우스키라면 작년에 <팩토텀>이라는 소설을 접했기 때문에 알고 있는 작가였다. 그렇게 만족스러웠던 건 아닌데 단편집에 괜히 더 눈길이 간 이유는 며칠 전 만난 20대 초반의 알있따운 아가씨가 그 단편집이 너무 좋다는 얘기를 했던 게 기억이 나서. 그리고 구입.
책 속 "역자 후기"에 따르면 원서를 둘로 나누어 번역 출간할 예정이라고 되어 있으나 아마도 판매 상황상 두 번째 책을 내는 건 무리였나보다. 아무려나 조금 기대를 한 채 읽기 시작했고 보았고, 우와앗! 이 소설 역시 "회"라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다섯 번째 위치하고 있는 단편 "기력조정기"라는 소설을 보고 책을 덮은 후 새로 쓸 소설을 열심히 구상해보았다. 노트에 아이디어를 끼적대면서. 하여간 소설을 쓰게 만드는 소설들이 있다. 샐린저도 그렇고, 하진도 그렇고, 오츠이치도 그렇고, 부코우스키도 그렇고. 하진은 좀 웰메이드에 가까운 소설이지만 다른 소설들은 나에게 "회". 하핫.
이쯤에서 부코우스키 형님

(출처 : 구글에서 검색;)
굉장히 깔끔하고 단정하다. 찾기 어려운 사진이다.
포토샵을 했을리는 없겠지만, 사기와 왜곡에 가까운 사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소설을 읽고 나서 느끼는 작가에 대한 이미지는..
부코우스키 형님의 원래 이미지랄까..




(출처 : 구글에서 검색;;)
역시나, 부코우스키라면 뭐 이런 느낌이랄까.
그에게 빠져선 안 될 것들. 술, 담배, 섹스.
그러거나 말거나 마지막 사진의 느낌은 되게 좋다.
담배를 꼬나문 채 거드름 피우고 있는 부코우스키의 표정도 좋고, 고개를 한껏 뒤로 젖힌 채 활짝 웃어제끼고 있는 여자의 모습도 좋으며, 술과 담배 등으로 어질러진 책상 또한 좋다. 포토그래퍼를 포함해서, 사진 속의 그들은 이 순간 과연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까.
덤으로, 아래는 예전에 써둔 <팩토텀>에 대한 짤막한 감상문.
펼치고 또 펼치면..
[2008.03.19]
찰스 부코우스키의 <팩토텀>을 보았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헨리 치나스키가 "'전쟁이 발발했는데 군대도 안 가고' 미국 전역을 떠돌며 20여 곳의 새로운 직장을 구하고" 거기서 생긴 돈으로 술을 퍼(처) 마시고, 여자랑 자고(소설에서 나오는 노골적인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표현하자면 '빠구리하고') 그러다 일터에서 짤리는, 아주 단순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일상을 단조롭게 나열하고 있다. 말하자면, 옮긴이의 말을 빌려,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를 묘사하는 데 필요한 단어는 "술, 여자, 그리고 잡일" 이 세 개면 충분하다. 그러므로 "이 세 단어의 끝없는 변주와 반복" 이 소설의 전부라고도 할 수 있다.
책소개에 의하면 주인공은 "미국 대중문화에서 안티 히어로의 정점으로 평가받는 캐릭터"라고 하는데, 얼핏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인 홀든 콜필드가 더욱 삐딱하게 성장하여 20대가 되면 헨리 치나스키와 유사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고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 조르바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고민에 빠"지 지는 않는다. 주인공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저질이고 수준 이하며 인간말종(쓰레기)에 가깝지만, 동정이나 연민과는 질적으로 다른 '기묘한 끌림'이 있다. 나에게 이 소설은 캐릭터만이 도두 보이는 전형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데, 그건 다 이 '기묘한 끌림' 때문이다.
이 인물이 당대와 맞닿아 내게 시사하는 점이 있다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엔 헨리 치나스키와 정반대의 캐릭터가 많이 있다는 사실. 그러니까 한국의 일부(라고 믿고 싶은) 대학생. 헨리 치나스키나, (도서관에 즐비한) 우리나라 대학생이나, 내 (좁은) 이성으로 이해하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다만 이해하려 애쓰며 바라볼 뿐. 물론, 아쉽게도, 아직 후자에서 '기묘한 끌림'이 있었던 적은 없다.
2009년 11월 9일 월요일
테드 창은 예외
며칠 전 소설가의 미덕이라며 과작하는(과자먹는?) 작가는 관심이 없다고 했는데 예외가 있다. 어차피 모든 일에는 예외가 있는 법. 테드 창이 바로 그 예외의 주인공이다.
1990년 "바빌론의 탑"이라는 단편을 발표한 이후 2002년 <당신 인생의 이야기>(한국엔 2004년에 번역 출간)라는 책이 출간되기까지 고작 8편의 중단편밖에는 발표하지 않았다. 1년에 채 한 편도 되지 않는, 무지하게 과작의 작가. 하지만 나는 테드 창을 사랑하고 테드 창의 작품을 사랑한다. (물론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의 소설이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고작 8편의 길지 않은 작품으로 책 앞표지에 홍보해둔 것처럼 휴고상, 네뷸러상, 로커스상, 아시모프상, 사이드와이즈상, 존 캠밸 Jr. 기념상을 수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소설을 통해서 SF의 정수를 볼 수 있기 때문만도 아니고, 그의 소설이 단편의 미학을 제대로 담고 있기 때문만도 아니다. 단 하나의 이유. 지금까지 읽어본 그 어떤 소설에서도 느껴보지 못한 단 하나의 이유. 그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도대체 인간은 어디까지 상상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으로부터 결국 '경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게 누구든, 독자로부터 경탄을 이끌어내는 소설을 쓰는 작가는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과작의 작가에게는 관심이 없지만, 테드 창만은 정말 예외의 작가다.
테드 창 님 쫌 동안인 듯!

(출처 : http://blog.fantastique.co.kr/32)
지난 여름, 비가 오는 와중에도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에 참석하고자 머나먼 부천까지 홀로 길을 나선 건 오직 테드 창을 실제로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강연을 듣고, 그의 책에 그의 친필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본 포스팅을 하며 <당신 인생의 이야기>를 살펴보다 책 앞 페이지에 있는 테드 창의 사인을 보고는 생각난 김에 예전에 간략하게 정리해 둔 강연 내용을 올려둔다. (참고로 테드 창은 67년 생이다.)
[09.07.20]
SF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테드 창이 생각하는 SF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던 강좌였다. 테드 창에게 SF와 판타지를 구별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르적인 특성을 구별하는 일이라기보다는 서사 방식의 차이를 구분짓는 것이었다.
테드 창에 따르면 판타지는 아주 일반적인 패턴을 따른다. 그러니까 (평화로운) 원래의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를 위협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주인공은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사건은 원만히 해결되고 다시 평화로운 세계가 찾아온다. 그리하여 판타지는 정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대단히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세계를 유지하는 일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보일 수 있으니까. 그러면서 든(깐) 작품으로, 마이클 클라이튼의 <쥬라기 공원>. 더불어, 이러한 구조적인 이유로 속편을 만드는 일 또한 어렵지 않다고.
반면에 SF는 판타지와 반대되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패턴을 띤다. 어떤 (평화롭다고만 볼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고, 그 세계를 뒤흔들 만한 사건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그 사건 후에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사건이 끝나면 또 다른 세계가 등장한다. 그리고 결국 그 세계에 대한 판단은 독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기본적으로 SF는 '변화'를 담는 장르다. 그러면서 든 작품으로, 아시모프의 <Dead Past>. 더불어, 이러한 구조적인 이유로 속편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어떤 특수한 물건이 SF와 판타지에서 각각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판타지에서 특수한 물건은 주인공이나 아주 극소수의 인물에게만 주어진다. 그리하여 그 물건을 통해 주인공(의 능력)은 부각될 수 있고 결국 "주인공 만세"로 귀결된다. 반면 SF에서 특수한 물건은 대체로 일반화되고 보편화된다. 그리하여 그 물건으로 인해 만들어질 세상에 대해서 상상해보게 된다.
테드 창은 까기 위한 목적으로 종종 <스타워즈>에 대해 언급했다. SF라는 장르적인 특성만 사용되었을 뿐, 그가 봤을 때 <스타워즈>는 SF가 아니니까. (레이저 칼이 나오고 우주선이 나온다고 모두 SF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SF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좀더 했는데, 우선 여기까지;)
강좌가 끝나고 (아마도) 영화제 주최측에서 몇몇 관객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했는데, 그중 오랫동안 SF 매니아라는 어떤 분에 따르면, 그냥 너무나 뻔한 얘기들만 해서 별로 유익하지 못했다고... (나는 되게 재미있고 좋았는데 ㅎㅎ)
강좌 끝나고 한 시간 후에 장소를 옮겨서 팬미팅 시간을 가졌다.
카메라 후레쉬가 미친 듯이 터지는 가운데... 그는 미발표 신작 단편 소설을 낭독했(으나 영어였기 때문에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 후 질의응답 시간이 잠시 이어졌고 그것이 끝난 뒤, 책에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왼손으로 책에 사인을 했고, 오른손으로 나와 악수를 했다.
PS. 테드 창과 관련된 포스팅이 여러 곳에서 눈에 띄는데 그중 http://twinpix.egloos.com/4451772 이 사이트가 가장 정리가 잘 된 것 같다. //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마이조 오타로 소설들
지금까지 읽은 마이조 오타로의 소설들을 마음에 들었던 순서대로 나열해본다.
1. <아수라 걸>
2.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정말 사랑해"
3. "우리집의 토토로"
4. "모두 씩씩해"
5. <연기, 흙 혹은 먹이>
6. "메쿠로메쿠"
7. "소말리아, 서치 어 스위트 하트"
8. "스쿨 어택 신드롬"
9. "데드 포 굿"
10. "화살을 멈추는 다섯 마리의 부리 없는 새"
마이조 오타로 스타일이 묻어나는 단편은 확실히 별로다. 단편보다는 중편이나 장편에서 오타로의 스타일이 잘 사는 것 같다. 어제 그제 봤음에도 8번이나 9번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도 잘 안 난다.
열 편의 소설 중 가장 非오타로스러운 소설은 3번이다. 굳이 거칠게 비유를 하자면, 다른 소설은 (데스)메탈인데 반해 3번은 경쾌한 댄스락 정도의 느낌이랄까. 제목을 보면 쉽게 알 수 있겠지만, 3번을 읽고나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가 보고 싶어 진다.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오츠이치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보았다. 아무튼 이런 소설이 있다. 그러니까 내가 가진 어휘력으로는 소설에 대해 한 마디도 표현하기 힘들어 다른 사람들의 감상을 읽고 싶게 만드는 소설. 그런 의미에서 샐린저의 단편소설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다르다... 고 쓰고 보니 어쩐지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샐린저 단편을 안 본 지가 꽤 돼서 기억이 아리송하여 잘 모르겠는데 흠. 아무튼 소설을 읽고 나서 이렇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낀 게 샐린저 이후 꽤 오랜만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엄청나게 읽어댔지만 딱히 눈에 띄는 리뷰는 없었다. 샐린저를 읽고 표현하기 힘들었던 그 느낌을 살려 소설로 쓴다고 썼었는데, 한 2년 반 전에... 뭐...
그리고 또한, 고진이 말한 '발견된 아동'의 의미에서는 히구치 이치요가 떠올랐다. 그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키재기>. <키재기>의 20세기 버전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있지만, 19세기 말엽의 아이들이 20세기 말엽에 와서는 이렇게 변했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소설 배경의 분위기(마을)는 두 소설이 대단히 비슷하다.
오츠이치 사진.

(출처 : http://alvinology.wordpress.com/2009/01/24/otsuichi-%E4%B9%99%E4%B8%80 )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로 작가의 얼굴을 가늠하는 일이 가능할까. 적어도 오츠이치에게 있어서는 완벽하게 불가능하다. 세상에 이렇게 선한 얼굴을 가지고 이다지도 악한(?) 소설을 쓰다니! 발터 벤야민은 "한 권의 책은 우리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했는데 적어도 지금 본 이 소설은... 내면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에서 한걸음 더 나갔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츠이치 소설 좀 더 봐야겠다.
2009년 10월 9일 금요일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http://news2.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91346&load_bal=yes
올해 노벨문학상은 처음 들어본 작가가 탔고(번역된 책이 없으니 그럴 수밖;;), 올해 부커상도 처음 들어본 작가가... 그 말은 곧 쿳시가 떨어졌다는 얘기.
오늘 이 사실을 확인했는데 위 링크된 기사에서 쿳시의 신간이 출간됐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다. 아, 출간 소식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리는 작가 있으니 이 어찌 좋지 아니한가. 책 제목은 이 글의 제목이기도 한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 당장 주문하려고 했으나 온라인 서점엔 아직 안 떴네. 번역은 물론 쿳시 소설을 전담해서(?) 번역하시는 왕은철 교수가 했고, 꾸준히 쿳시 소설을 펴내던 들녘이 아니라 출판계의 대기업 민음사에서 출간됐다.
위 소설은 이번에 부커상 후보에 오른 소설이 아니라 2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다. 쿳시나 하진이나, 대학교에서 교수하면서 열심히 소설도 써내고 하는데 우리나라 작가들은 교수만 하면 그걸로 그냥 끝이니 나원참. 우리나라만큼 오육십대 작가의 활동이 부진한 나라가 또 있을까.
2009년 9월 21일 월요일
쿳시 삼관왕, 매카시 신간
1.
http://www.themanbookerprize.com/news/stories/1275
이달 초에 맨부커상 최종 후보가 발표됐나본데, 쿳시의 작품이 다시 한번 부커상 후보에 올랐다. 기존에 <마이클 K>, <추락>으로 부커상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 이 작품으로 또 받게 되면 부커상을 세 번이나 받는 최초의 작가가 된다. 우와아아아.
후보 작가들 중 바이어트만이 친숙한 이름이고 나머지는 누군지 모르겠다. 이럴 때마다 영어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는...
아무려나, 현존하는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이니만큼 꼭 받았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다. <추락>으로 두 번째 수상할 때 이미 같은 작가에게 두 번 상을 수여하지 않는다는 부커상 심사 내의 불문율을 깨트린 만큼... 무엇보다 소설 내용이 어떨지도 궁금하고. 지금쯤이면 아마도 왕은철 교수가 열심히 번역하고 있겠지.
나는 어쩌면 "아이스피켈로 머리를 얻어 맞는 느낌"을 느끼고 싶어서 (실제로 맞을 수는 없으니까;;) 쿳시의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2.
코맥 매카시의 신간도 출간됐는데, 출간일자는 7월 24일로 되어 있는데 인터넷 서점에서는 최근에서야 신간 코너에 소개되었다. 국경 3부작 시리즈의 세 편 중 <모두 다 예쁜 말들>은 이미 번역되어 나왔었고, 나머지 두 편인 <국경을 넘어>와 <평원의 도시들>이 같은 출판사에서 같은 번역자에 의해 번역되어 나왔다.
매카시는 '완소'에 이르기 직전에서 잠시 보류된 작가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로드>, <모두 다 예쁜 말들>까지는 정말 신나게 봤는데 <핏빛 자오선>에서 뭔가 덜컥거린 기분이었달까. 그래서 읽다가 말긴 했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매카시는 소설의 어떤 새로운 지형을 그려낸 작가인 듯하다.